부처님의 4무애지(無碍智) > 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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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4무애지(無碍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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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7-06-28 04:21 조회32,540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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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법무애

 

불교를 종교성으로 설명할 때 어디까지가 불교이며 또 얼마만큼 까지가 불교인가 하는 것에 대해 그 경계와 영역을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고들 합니다.

이점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확실한 변별력을 가지는 이유이며 불교를 돋보이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의 지향점이 진리로움의 깨달음에 있는 것과

그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수행이 강조되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 철학, 과학, 문학 등 모든 인문사회학적 사상을 겸비하고 있고

동시에 세속적 이해로 파악되는 개념을 초월하여 생각이 미치지 않는, 인식과 사유의 대자유가 성취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합일되어짐을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기에 본질은 지혜와 진리의 깨달음 그리고 공덕으로 바탕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의 성품을 법(진리)이라고 하며 법은 인연 따라 형상으로 들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붉게 물든 나뭇잎 하나가 존재의 형태로 들어난 것을 현상의 사(事)라고 한다면 이렇게 형상으로 들어날 수 있도록 조화와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원리인 법의 이치가 실재의 법(法)입니다.

이 법에는 현상과 실재, 실재와 현상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분리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의 3업에 의해 행불행이 있게 되는 것으로써

이러한 결과의 답보로 나타나는 근원은 진실상주한 법계가 작용되었기에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우주만법에는 만법 그 자체에 법이라는 깨달음의 본성이 실재하므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작용도 일어나게 되고 또한 우주만법에 대해 그 실체와 현상변화의 작용 등 진리의 표출로 들어난 현상과 본성을 올바르게 깨달음으로 체화된 온전한 분은 석가세존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신분을 일러 각자(覺者), 또는 붓다(Buddha)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각된 법, 드러난 법. 우주만법에 대해 설법과 시설하여 주시는 부처님의 지혜능력은 조금도 막힘과 의심과 의혹 그리고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법에 대해 섭법능력의 걸림이 없으신 그 위덕과 위신력을 법무애(法無碍)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법상(法相)에는, 처음 내는 마음, 욕심 내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좋은법, 악한법, 세간법, 출세간법, 유루법, 무루법, 유위법, 무위법, 선업, 악업, 생멸법, 열반법, 보리평등법, 법성평등법 등에 대해 여실히 아시고 설법하시기에일체법에 대해 걸림이 없으시므로 붓다를 법주(法主)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법의 주인, 법의 왕 등으로 숭배, 존경하는 이유도 법을 체현하신 분이시기에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곧 법이시기에 법주라고 하는 연유와 관련해서 불교를 교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때 바로 ‘법을 깨닫는 가르침’이 되며 ‘깨달음의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즉불 불즉법(法卽佛 佛卽法)의 관계 성립이 진리 그 자체 성품으로 부처님과 법은 동체가 되고 지력(智力)을 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무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무애(義無碍)


의무애는 뜻에 걸림이 없는 지혜를 말합니다.

 뜻[義]이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어떤 사건, 사물에 대해 본질적인 근원에 대한 의미, 이치, 이유 등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본질적인 측면의 내용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 그 의미와 이치, 이유 등을 아무런 장애 없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또 이것을 체현한다고 하는 것은 감히 평범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봄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있는 사실을 직면해서 이에 대해 그 이유와 의미 등을 설명해 본다고 한다면 중생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표면상에 국한된 내용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진리의 생명 작용원리인 법성, 불성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으로 담고 있는 번뇌장, 소지장 이라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그 실상을 바르게 볼 수 없고 또 그것과 합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존재의 현상에 대해 뜻을 설명 할 수 없답니다.


그러나 석가세존께서는 수행을 통해 마음에 번뇌심이 소멸 되어 본래 진성인 광명 지혜가 발현 되어 짐으로써 우주 만법의 근원인 이체를 낱낱이 다 여실지견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무애는 깨달음이 체현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진리를 설명할 수 없는 무상묘각(無上妙覺)의 경지이며 지혜가 살아 숨 쉬어 활발한 상태 인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만이 오직 할 수 있는 능력이시며 부처님의 지덕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간, 출세간에 대한 일체의 근원을 걸림 없이 설명해 주시는 부처님의 전지전능한 선교방편의 위신력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 없는 가운데에서도 진리의 묘상을 일깨워주시고 , 또 어떤 때는 자상한 말씀으로 차례차례 이치를 터득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한 가지 예로 들면 부처님 당시에 사위국에 파사나익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아직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왕위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을 처형하였습니다.왕은 이로 인해 괴로워하던 중 부처님을 만나 뵙고 괴로움을 하소연하였고 부처님은 차례차례 인생관, 업보, 선, 악 등 그리고 법으로써 정치 등에 대해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하여주었답니다. 또 말없는 가운데 진리의 묘상을 보이신 것으로는 선종법문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실 때 꽃 한송이에 들어 대중을 항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대중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지만

마하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음으로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걸림 없는 지혜로 진실한 뜻(義)을 설법, 설명해 주는 것은자신 스스로가 뜻과 일여한 상태가 되지 않고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사회에서 보면 가짜가 진짜인양 주장을 하고, 거짓이 진실인양 우겨대는 우스운 꼴을 보기도 합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보지 않고 관련된 문제를 머리로만 이해하여 남에게 알려준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어디까지나 피상적이고 피동적인 것에 그치기 마련이며 능동적이고 절대적인 신뢰와 수용의 교감이 되기까지는 어려울 수밖에 없답니다.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修行)이 강조됨과 동시에 실천행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무애(義無碍)는 진실한 내용의 뜻에 대해 통연명백, 명증설법하는데

조금도 장애가 있다거나 부족, 의심, 의구 등이 전혀 없는 것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성현의 가르침인 진실한 뜻을 성제(聖諦)라고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사무애(辭無碍)

 요즘 널리 사용되고 있는 ‘소통’이라는 단어를 보면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막힘이 있으면 서로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게 되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불편함을 겪게 되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반대로 소통의 원활함이 있게 되면 상호간에 불편함이 해소되고 함께 추구하는 목적이 원활히 성사되어 서로 공유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답니다. 그래서 소통이 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매우 중요하고 특히나 소통의 본질은 의사전달에 있는 만큼 사회의 모든 관계는의사소통이 얼마만큼 잘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사회의 행복지수도 비례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소통은 서로 간에 진실을 이해하고 그 진의(眞意)와 합일되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서로 질서를 따라 소통으로 하나가 된다면 차별, 분별이 없으며 불행, 고통도 없고 만사형통으로 행복 그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우리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사회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찰나 찰나 무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세계이고 부서지는 세계이므로 부서지는 세계에서 부서지지 않기를 갈구하는 마음이 늘 함께하고 있기에 그 또한 바람과 소원, 희망은 인간의 삶 그 자체로 되어버렸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이 세계에서는 서로 각자의 바람과 희망 목표가 있기 때문에 각자가 지니고 생각하는 사고와 행동의 표현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하게 됩니다.

 

언어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사회의 공기는 건전하고 건강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투쟁과 반목 등으로 암울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과 범부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는 기준의 가운데 하나가 성인은 모든 세계에서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고 어떠한 언어나 어떠한 것과도 언어소통이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듣는 측면만의 능력을 갖추신 것이 아니라 대상과 직접 서로 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시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위대한 신통변지는 진리를 깨닫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며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만이 깨달음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통해

발신자의 들어난 언어의 내용을 직관하고 체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언어소통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신 부처님께서는 성인 중에 성인이시며 조금도 막힘없이 일체의 능력을 갖추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무애. 사무애 변지라고 합니다.


삼계에 거주하는 중생들의 언어를 다 통달하시고 하나하나 질문에

미혹을 거두어 주시는 부처님의 신통변지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답니다. 어느 때는 축생인 개에게도 법문을 하시어 개로 하여금 자기의 잘못을 반성케 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여주시었고. 불교 이외의 외도나 철학, 종교인 누구에게도 막힘없이 언어소통이 잘 이루어져 그들로 하여금 감화를 받게 하여 불교에 귀의시킨 일들이 참으로 많이 일어났으며 천인들과도 대화를 하시어 부처님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불타가 되시었다는 설명을 하여주시었고, 술에 취한 코끼리를 제도하시기도 하였고, 불을 뿜는 독룡도 언어소통이 되시었기에 독룡을 교화 시키시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사무애(辭無碍)는 신통 변화하시는 뛰어난 위신력이시기에 삼계대도사라 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능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시기에 상대를 교화하시어 대자대비의 행복을 주시는 부처님이야말로 사생(四生)에 자부이심을 보다 더욱 명확하고 실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하겠습니다.

 

 ④ 요설무애(樂說無碍)

 인간사회에서 화합과 평화와 사랑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무엇보다도 상호간에 의사전달이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만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가 아마도 지배적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소통’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주요화두인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특히 인문학에서는 더욱 그러하고 언어학자들의 주장도 예외는 아닐 성 싶습니다.

한마디 말로 큰 일이 이루기도 하고 반대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해서 어렵지 않게 목도합니다.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전달할 때에는 상호간의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한 자기의 의사가 바르게 전달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바른 이해가 수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발화자의 인격과 품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그릇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언사를 비단같이 곱게 한다고 하여 그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강아지가 큰 소리로 멍멍 짖는다고 훌륭한 강아지라고 할 수 없듯이 언사의 행동에 어떤 기준이 있다고 볼 것이 아니라 표현방법과 내용의 질 그리고 상대에게 얼마만큼의 감동을 주고 바른 이해를 전달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수행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수행은 구업을 맑고 청정하게 닦아 가는 행위임을 알 수 있고 수행이 완성된 자만이 언사에 능통하여 설명과 설득에 조금도 장애가 없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의 중생은 자기의사 중심에서 이야기하고 자기 견해와 식견을 내세워 자기의 틀 안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대다수 인간사회의 언어소통은 이런 형태입니다. 그러다보니 각자가 자기주장, 자기 견해를 내세우고 상대의 의견, 의사를 경청하여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강박심리가 팽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통의 사회가 도래하게 됩니다. 불통의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불신풍조를 우리는 매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IT(information technology)산업이 발달하고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우리사회이지만진즉 인간미덕을 담고 있는 상호간의 정다운 대화는 적어지고

오히려 냉소적인 자기중심의 주장이 늘 앞장 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완성되어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의 언어행위는 어떠한 상대를 만나서 대화하더라도 상대의 입장을 잘 헤아려 상대의 근기에 맞게 말씀을 하여주시는 뛰어난 언어방법의 위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을 요설무애(樂說無碍)라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왕위보존을 위해 서모의 아들 백명과 이백명의 사람을 죽인 프라세나짓왕의 근심과 고통을 부처님께서는 하나하나 선,악에 대해 설명해 줌으로써 프라세나짓왕을 교화시킨 방법과 미모가 뛰어난 옥야라는 여인의 교만을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아내의 도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줌으로써 교만했던 옥야여인을 교화하여 훌륭한 며느리가 되도록 했던 일들은 모두 부처님의 뛰어난 요설무애의 지력이기 때문에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요설무애의 방법은 지혜덕성과 법성삼매(法性三昧)의 경지에서 펼치시는 교화방법입니다. 즉, 상대의 근기를 헤아려 보시고 근기에 맞게 대화하시니

맑고 아름다운 흐르는 물과 같이 걸림 없이 말씀하므로 요설무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방법으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도 하고,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하며,

또 순서에 따라 교화하시는 방법으로는 차제설법(次第說法)이며, 비유를 들어 설명하실 때는 비유설법으로 상대를 교화시킨답니다.


이와 같이 요설무애의 지력은 상대의 근기에 맞게 물 흐르듯이 걸림 없이 그에 맞는 방법으로 능수능란하게 설득, 이해, 수용, 교화되도록 상대와 언어소통을 이룸이라고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지선행님의 댓글

지선행 작성일
현상을 통달하여 일체법에 걸림 없는 지혜
분석 사유 분별함에 통달하여 온갖뜻에 걸림 없는 지혜
소통의 기술에 통달하여 설법에 걸림 없는 지혜
설득 교화의 기술에 통달하여 설법듣는 중생도 기쁘게 하는 지혜

스님의 적절한 예와 비유로 쉽게 이해 되었습니다. 스님또한 사무애와 요설무애를 통달하신듯....

자현님의 댓글

자현 작성일
삼보에 귀의합니다.부처님께 감사합니다.

Green님의 댓글

Green 작성일
법주이신 부처님께서 뜻에 통달하시고,, 막힘없는 설법을 하시는데 대자대비심으로 대기설법 차제설법 비유설법으로 깨달게하십니다. 모든 경을 설하실때 그자리에 많은이가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은서님의 댓글

은서 작성일
설법 능력이나 뜻에 걸림이 없었고, 소통을 잘 하셨으며 말로 교화하는 데도 뛰어나셨다는 부처님... 법무애, 의무애, 사무애, 요설무애 등이 부처님의 4무애지 라는 말씀이시죠? 아직도 안개 속에 있지만 스님의 수업을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스님 수업을 들을 때는 안개가 걷히는 듯 하다가도 돌아서면 다시 안개 속입니다.

최하연님의 댓글

최하연 작성일
부처님이 보여주신 지혜 중 의무애를 보면서 제 일상 버릇 하나를 참회할까 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뛰어난건 아닌데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습득하거나 깨달음으로 얻은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면 지식이고 느낌.. 즉 제 나름대로 상황에 대한 촉?( ㅎㅎ 맞는 표현이 아니지만)  여튼 불확실한 정보를 남에게 주면서 나름 제 주변인들에게 어느 순간부터 말 잘하고 상황 파악에 빠른 사람이 되 있었습니다.
실상 그게 아닌데 저도 저를 평가할때  아.. 나는 직감이 빠르구나 하고 믿을 정도로... 참회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말하는 능력? 이란게 주어졌다면 저는 이제부터라도 저의 주관적인 지식이나 직감에 의해 남에게 전달하는것이 아니라 한번더 사물을 들여다보고 정말 진실되고 타당한 존재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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