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학의 향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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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작성일16-09-23 21:28 조회24,2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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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분 거사님들이 작성하신 내용을 가지고 나름 공부 해볼까 합니다.
열공하시는 보살님들의 자세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열심히들 하지만 글쎄요.
보살님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반이라도 따라 갈지?????
*********
십이연기/사성제/팔정도를 공부했습니다.
일체의 존재는 생멸변화하고 이합집산하여 항구불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무상변이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법의 실상을 아는것이 명이고 지혜인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무명이다. 이런 무명이 사람에게 있게되면 이것을 연하여 행이 있게되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게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고통같은 일체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교설을 십이연기설이라고 하는데 이 십이연기설의 핵심은 "인간의 괴로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지함에서 연기한 것"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을 타파하는데 있을 것인데 그 무명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표적 수행의 길을 제시한 것이 사제설이다.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생기고 또 어떻게 이를 없앨것인가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교서가 사성제이며 다음과 같다.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보통 생, 노, 병, 사와 미운것과 만나는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리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 등을 들고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 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해서 발생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오온에 대한 탐냄이라든가 또는 희탐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낙착할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고 한다.
셋째, "괴로움의 멸" 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 무명을 없앰으로써 괴로움을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이 되어 있고, 이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진이 그것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법을 잘 결택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사유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 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바와 생각 안할바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와 정업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가지 선한 구업이요, 후자는 세가지 선한 신업이라고 말한다.
정명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하라는 것이다.
정정진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다.
정념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것이다.
정정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팔정도에서도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있는 것이 정견과 정정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공부한 것을 정리 해 보았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지혜가 없음에서 비롯되고 그런 괴로움은 그런 무명을 타파함으로써 극복이 될 수 있으며, 그런 무명을 타파하기 위한 실천행으로서 팔정도를 실천하면 된다고 제 나름 대로 요약 정리 해 보았습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찾아오는 무수한 괴로움들이 다 저의 무명에서 비롯됨을 알았고 이놈들은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좀 들뜨게 하네요. 팔정도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고 있는 만큼이라도 꾸준히 행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해 봅니다.
심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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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에 귀의하옵고
모든 도반님들의 정성어린 탐구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지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주지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서 네분들의 자료에서 보았지만 무명의 실체부터 시작하여 팔정도를 완성하여 해탈의 경지로 들어서는 것이 우리의 피안의 길일 것입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의 반대는 반야바라밀다로서 저는 12연기에 버금가는 "사지연기"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반야부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다"를 궁극적 실체로 하지요. 그것에 이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엔 어떤 차별이 있을 것이란 겁니다.
우리가 매주 또는 예불시간마다 "보살은 반야 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르나니 마음의 걸림이 없고 마음의 걸림이 없기 때문에 놀람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어 궁극적인 열반이 있게 된다" 라고 설하심을 볼 수 있으며 독경을 하지요.
이 뜻을 반대로 하면 "중생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다. 고로 마음에 걸림이 있다. 마음의 걸림이 있으므로 놀람이 있고 뒤바뀐 생각이 있고 생사가 있게 된다."로 바꿀 수가 있지요. 여기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 "마음의 걸림"이 바로 12연기의 무명에 해당 한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무명이란 법칙성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며 반야부 경전에서의 법칙성은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무지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반야부 경전 차원에서의 무명이 바로 "마음의 걸림"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걸림"이 있으므로 "놀람" "뒤바뀐 생각" "생사"의 법들이 연이어 발생하거니와 이 또한 무명을 연하여 "행,식 내지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는 12연기설과 그 유형상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후가 생사로 끝남으로서 진리에 대한, 지혜에 대한 무지로부터 인간의 생사가 귀결되었다는 12연기설의 의미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나아가 <반야심경>은 마음의 걸림에서 생사가 발생한다는 측면보다는 마음의 걸림을 멸진함으로써 생사가 사라진 궁극적인 열방을 얻게 됨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연기의 법칙성이 죽음의 극복을 반드시 성취하고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반야심경 >에 설해진 "마음의 걸림" "놀람" "뒤바뀐 생각" "생사 윤회"의 4가지 법의 발생은 "사지연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불교의 근본교리"에서
홍원 합장
열공하시는 보살님들의 자세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열심히들 하지만 글쎄요.
보살님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반이라도 따라 갈지?????
*********
십이연기/사성제/팔정도를 공부했습니다.
일체의 존재는 생멸변화하고 이합집산하여 항구불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무상변이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법의 실상을 아는것이 명이고 지혜인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무명이다. 이런 무명이 사람에게 있게되면 이것을 연하여 행이 있게되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게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고통같은 일체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교설을 십이연기설이라고 하는데 이 십이연기설의 핵심은 "인간의 괴로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지함에서 연기한 것"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을 타파하는데 있을 것인데 그 무명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표적 수행의 길을 제시한 것이 사제설이다.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생기고 또 어떻게 이를 없앨것인가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교서가 사성제이며 다음과 같다.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보통 생, 노, 병, 사와 미운것과 만나는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리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 등을 들고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 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해서 발생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오온에 대한 탐냄이라든가 또는 희탐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낙착할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고 한다.
셋째, "괴로움의 멸" 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 무명을 없앰으로써 괴로움을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이 되어 있고, 이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진이 그것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법을 잘 결택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사유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 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바와 생각 안할바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와 정업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가지 선한 구업이요, 후자는 세가지 선한 신업이라고 말한다.
정명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하라는 것이다.
정정진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다.
정념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것이다.
정정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팔정도에서도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있는 것이 정견과 정정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공부한 것을 정리 해 보았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지혜가 없음에서 비롯되고 그런 괴로움은 그런 무명을 타파함으로써 극복이 될 수 있으며, 그런 무명을 타파하기 위한 실천행으로서 팔정도를 실천하면 된다고 제 나름 대로 요약 정리 해 보았습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찾아오는 무수한 괴로움들이 다 저의 무명에서 비롯됨을 알았고 이놈들은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좀 들뜨게 하네요. 팔정도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고 있는 만큼이라도 꾸준히 행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해 봅니다.
심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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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에 귀의하옵고
모든 도반님들의 정성어린 탐구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지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주지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서 네분들의 자료에서 보았지만 무명의 실체부터 시작하여 팔정도를 완성하여 해탈의 경지로 들어서는 것이 우리의 피안의 길일 것입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의 반대는 반야바라밀다로서 저는 12연기에 버금가는 "사지연기"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반야부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다"를 궁극적 실체로 하지요. 그것에 이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엔 어떤 차별이 있을 것이란 겁니다.
우리가 매주 또는 예불시간마다 "보살은 반야 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르나니 마음의 걸림이 없고 마음의 걸림이 없기 때문에 놀람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어 궁극적인 열반이 있게 된다" 라고 설하심을 볼 수 있으며 독경을 하지요.
이 뜻을 반대로 하면 "중생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다. 고로 마음에 걸림이 있다. 마음의 걸림이 있으므로 놀람이 있고 뒤바뀐 생각이 있고 생사가 있게 된다."로 바꿀 수가 있지요. 여기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 "마음의 걸림"이 바로 12연기의 무명에 해당 한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무명이란 법칙성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며 반야부 경전에서의 법칙성은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무지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반야부 경전 차원에서의 무명이 바로 "마음의 걸림"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걸림"이 있으므로 "놀람" "뒤바뀐 생각" "생사"의 법들이 연이어 발생하거니와 이 또한 무명을 연하여 "행,식 내지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는 12연기설과 그 유형상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후가 생사로 끝남으로서 진리에 대한, 지혜에 대한 무지로부터 인간의 생사가 귀결되었다는 12연기설의 의미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나아가 <반야심경>은 마음의 걸림에서 생사가 발생한다는 측면보다는 마음의 걸림을 멸진함으로써 생사가 사라진 궁극적인 열방을 얻게 됨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연기의 법칙성이 죽음의 극복을 반드시 성취하고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반야심경 >에 설해진 "마음의 걸림" "놀람" "뒤바뀐 생각" "생사 윤회"의 4가지 법의 발생은 "사지연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불교의 근본교리"에서
홍원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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