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火. '보살십지'공부 중 三乘고찰 숙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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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24-08-13 16:46 조회4,4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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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원(한희주)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을 말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나 소질에 맞게 셋으로 나누어서 설한 것이다. 삼승에는 성문승(聲問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성문승은 ‘소리를 듣는 것을 탄다’라는 의미로,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이다.연각승이란 ‘인연(因緣)을 깨닫는 것을 탄다’라는 뜻으로 12인연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12인연법을 관(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교법으로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부른다.보살승이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특히 보살승은 많은 사람들을 부처가 되게 해 불승이라고도 한다. 이 중 이승(二乘)이라고 불리는 성문승과 연각승은 혼자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해 소승불교로,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법화경〉에서는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 등 각각의 고유한 실천법이 있다고 하는 삼승의 견해에 대해, 삼승은 일승으로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불교신물>
어느 날 부자가 외출한 사이에 철모르는 아이들이 노는 집에 불이 났다. 아이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뛰어노는데 정신이 없자, 아버지는 한 가지 비책을 생각하였다. 아이들이 평소에 원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문밖으로 나와서 마음대로 가지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들은 좋아하면서 모두 문밖으로 나왔다. 우선 아이들은 불난 집에서 피난한 것이다. 그러나 문밖에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아닌 큰 흰 소가 끄는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약속한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대신 이 세상에도 드문 큰 흰 소가 끄는 훌륭한 수레를 선사한 것이다. 아이들은 뜻하지도 않았던 큰 수레를 선물로 받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것이 화택삼거의 비유 설화이다.
이 이야기 속의 부자인 아버지는 부처, 아들들은 성문연각의 소승, 불난 집은 고해인 이 세상, 세 가지 수레는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법, 한 큰 흰 소의 수레는 일불승법이다. 부처는 생사의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은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법을 방편으로 베풀었지만, 결국에는 일불승법이란 진실한 가르침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출처 법화경>
♧•개인고찰
이번 삼승에 대해 공부하면서-
고해를 건너 큰 불국토에 이르는 큰지혜를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방편을 각 중생의 근기에 맞게 배풀어주신 부처님의 자비심에 큰 감복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펼치시던 약 2600년 전에도 여러형태의 수행법과 기도법이 있었는데 한가지 (오직 일승)법으로 강제 통합하신 것이 아닌 각자의 수행에 맞는 방편으로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 궁극의 목표는 대승의 일승으로 향하게 하시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
지장경을 읽다 보면 각자의 근기에 따라
구제하는 것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라고 하셨습니다. 큰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그물에 걸린 줄도 모르고 신나게 헤엄치며 순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저는 현재의 삶이 환 이라 배우고 들으면서도 알아차리기를 못하고 순간의 착각에 집착하여 다시 괴로움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 안일한 생각으로 '이번 생에 못하면 다음생에 하지!!!!' 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조금씩 이라도 발전하는 생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성불할 수 있겠지!!! 라는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살았던 지난날을 참회 합니다.
기필코 다음 생은 하품하생일지라도 아미타극락세계 성불학교에 입학하여지길 발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자성화(신은영)
1.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사성제(四聖諦)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궁극에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2. 연각승(緣覺乘, pratyekabuddhayāna)은 독각승(獨覺乘) 혹은 벽지불승(辟支佛乘)이라고도 하며,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고, 홀로 은둔하여 12연기를 직접 관하여 깨달음을 얻습니다.
3. 보살승(菩薩乘, bodhisattvayāna)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下化衆生]는 보살행을 의미합니다.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며 자리이타를 수행합니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오직 자신만의 불도를 이루고자 하여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에 소승(小乘)이라 폄칭하고 보살승은 자신이 불도를 이루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두루 구제하는 것에 힘쓰기 때문에 대승(大乘)이라고 합니다.
다만, 법화경 비유품에서 부처님께서는 화택의 비유를 통해, 삼승도 방편이요, 오직 일승의 깨달음만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삼승에 대해 찾아보고, 제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출가하여 승속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산속에 은둔하여 도를 닦고 있지 않는 이상, 세속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배우며 수행하는 우리들은 모두다 보살승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 자식, 형제를 비롯한 가족 관게며, 회사 상사, 동료, 친구등등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 속에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하는 우리 도반들은 모두 보살승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법을 만나 잘 살고 있는 것도 수많은 불보살님들의 보이지 않는 가피속에 살고 있구요.
물론 홀로 멀리 떠나, 아니면 집에서라도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독각승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엔 마음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가끔은 나만을 돌아보며 오롯이 수행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결국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남을 위하는 것이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성문의 수행과, 혼자 오롯이 들여다보는 연각의 수행, 자비를 행하는 보살의 수행이 모두 다 필요하지 않을까요? 결국에는 깨달아야 한다는…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법보신문 - 현진스님의 어원으로 보는 불교, 26 성문
네이버블로그 -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묘법연화경
#*원산(안학선)
숙제를 올립니다.
'삼승'이라함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대한 세가지 교법이며 "승" 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수레에 비유한다.
"성문승"은 4제현관 즉 고제,집제,멸제,도제 사성제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며, 열반을 증득하는 수행으로써 이타는 고려하지 않고 자리( 자신을 이롭게) 에만 치중 하는 일들을 말한다.
또 한 성문은 아공의 이치만을 깨달을 뿐 법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며 중생이 참다운 나라고 주장하는 실아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기본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 뿐 영원 불멸의 참된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깨닫지만, 이 세상의 모든것이 인연이 모여서 생겨났으므로 절대의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은(법공)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문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여열반을 증득하기는 하지만 그 아 가 법의 일부요, 아와 법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혼자만의 해탈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문으로서 해탈하는 길은 성문4과 라고 하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4단계를 설정하고있다.
수다원은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육진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이 번뇌가 없는 행을 닦는 것이며, 사다함은 욕망을 모두 버리고 번뇌를 끊었으므로 천상과 인간으로 태어나는 왕복 과정을 거쳐 완전히 해탈한다는 것이며, 아나함은 욕심을 벗어나서 다시는 욕심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뜻하고, 아라한은 끊어야 할 번뇌가 없고 떠나야 할 탐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없으며 분별이 없고 해탈의 경지에 있는 성자를 뜻한다.
" 연각승"은 12연기를 현관 하며, 또는 독각이라고도 하고 스승에 의하지 않하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이치를 관하여 혼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나 타내는 말이며, 성문과 마찬가지로 자리(자신을
이롭게) 에만 치중하는 이를 말한다.
"보살승"은 6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며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를 음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보디는 "깨닫다" 사트바는 "존재" 즉 보리살타는 깨달은! 존재 이다.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은 <선가귀감>에서 성문은 고요한데 머무는 것으로써 수행을 삼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니 귀신이 보게된다. 그러나 보살은 성품이 본래부터 빈 것임을 깨달아 그 마음이 스스로 고요하므로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으니 의도와 마군들이 보지를 못한다 고 하였다.
보살은 중생을 위한 실천이 있고, 성문은 아공의 이치만을 깨달을 뿐, 법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 하였다. 아공의 실아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기본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 뿐 영원불변의 참된 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법공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 모여서 생겼으므로 절대의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님 제자이지만 보살은 중생을 위한 실천이 있고, 성문은 자기의 해탈에 치중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선문승,연각승을 2승이라 라고한다. 소승불교 2승에 대해서 대승불교가 스스로 입장을 나타낸 것이 일불승 이다. 일불승은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직 한가지로서 그 가르침에 의해서 어떠한 사람들도 똑 같이 성불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승의 도에 따르는 수행하는 모두 보살의 이름으로 불리고 부처님의 전생에 무량의 선근공덕을 쌓은 것처럼 대상을 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뒤로 돌리고 우선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타행이 그 임무라고 한다. 그러나 성문• 연각의 2승도 역시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이며 3승의 도를 구별하는 것은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방편설에 불과하며 진실로는 오직 부처의 일승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가 < 법화경의 회삼귀일> 에 의해 강조되며 그것이 일불승의 본의로 되었다.
법화경에는 삼승을 설명하기 위해 네 종류의 수레를 등장 시키고 있다.
"성문"에 비유한 첫 번째는 양이 끄는 수레인데 힘이 약하다, 그다음 으로 "연각"을 비유한 사슴은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는 없지만 양보다는 힘이 뛰어나다.
세 번째로 "보살" 을 비유한 소가 끄는 수레가 등장한다. 튼튼하고 많은짐을 실어 나를 수가 있다. 네 번째로 "일불승" 으로 비유되는 흰소가 등장하여 뛰어난 힘과 많은 짐을 완벽한 수레로 양과 사슴의 수레의 짐을 모두 실어 나를 수가 있다.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 사상인 일승 또는 일불승이다. [*참고: 위키백과, 우리모두의 백과사전, 네이버 블로그 천석 회삼귀일]
각양각색의 모든 것을 하나로서 귀결 시키는 것이 보리수행이며 알아차림과 깨어있음을 여러차례 스님께서 말씀 하셨지만 일상생활에 익숙해져 있어 자주 놓쳐버리고 생각하기를 반복하면서 그 동안의 숙제들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읍니다. 이번 숙제를 통해서도 보살의 큰 뜻을 다시 한번 새겨 성찰하여 보았읍니다. 보살의 자리이타정신, 요즘 어려운 경제 여건에 상대에게 친절과 배려, 봉사,신뢰,를 하면서 "남을 잘 되게 도와주면 그것이 내가 잘 되는 일이다". 평범 하면서도 진리인 그 뜻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녹야원(이경희)
제가 조사한 삼승법 또한 다른 법우들과 많이 다르지 않아.. 짧게만 정리하고 제 생각을 써 보겠습니다.
1. 성문승: 사성제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얻음.
2. 연각승: 12연기를 직접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음
3. 보살승: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
저의 얕은 검색과 생각으로는 성문승과 연각승의 차이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느냐.. 그렇지 않고 직접 수행해서 깨닫게 되느냐... 사성제를 수행하는 것과 12연기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지 않나 싶은데요…
이번 법문에서 스님께서 다시 한번 강조하신… “행”의 중요성.. 왜 행이 젤 중하냐…^^는 보살승을 저희에게 강조 하시려 하신거 같아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 해 보았습니다. 법화경 사경하며 혼자 이해할때랑 법문을 듣고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또 다시 배우게 됩니다.
작년 초… 시간도 좀 여유 있었고 천일기도의 육바라밀 실천 지침에 따라..^^ 기도하며 가능한 많은 시간을 몸으로 행할 수 있는 봉사를 해보았습니다. 길지는 않은 기간 이였지만 절에서도 외부에서도 기도하며 봉사를 해 보니, 기도만 할때와는 다르게 마음과 몸으로 같이 와닿는 이치들이 있었는데요. 글과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네요 ^^;;;
요즘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정진하려는 노력을.. 글과 말로만 하지말고 실천을 해야할텐데 좌선을 시간내어 하질 못 해… 다른 방편만 우선 쓰고 있습니다. 이동시간이 많기도 하고 몸이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서라도 생각하려 하는데.. ‘아직도 벗지 못하는 저의 고착적인 번뇌를 나는 왜 붙들고 있나… 왜… 그런가… 알면서도 놓지 않는 건 왜인가..’ 답을 알듯하면서 모르는.. 혹은 모른척 하고 싶은 중생심으로 목적지를 설정 해 놓고도 저 멀리 돌아가는 중입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법연화경, 및 스님 일요법문]
#*정명(正明) 글 올립니다.
삼승(三乘)에 대한 나의 생각.
부처님이 사리풋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인용해 본다면 "어떤 중생이 안으로 지혜가 있어 여래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삼계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열반을 구한다면 이를 성문승 (聲聞乘)이라 하고,
어떤 중생이 여래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연의 지혜를 구하고,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고요한 곳을 즐기며 모든 법의 인연을 깊이 알면 이를 독각승(독각승)이라 하고,
또 어떤 중생이 여래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체지(一切智)와 불지(佛智)와 자연지(自然智)와 무사지(無師智)와 여래의 지견과 두려움 없음을 구하고, 한량없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들을 편안케 하며, 세상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그들을 제도하면 그를 대승보살(大乘 菩薩)이라 한다" 고 하시면서 법화경의 유명한 삼계화택에 비유하였습니다.
장자가 처음에는 세가지 수레로써 아이들을 구했고, 그 뒤에는 수많은 보배로 장식된 으뜸가는 큰 수레를 주었습니다, 여래께서도 처음에는 삼승으로 중생을 인도하다가 나중에는 대승으로서 제도하여 해탈케 합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한량없는 지혜와 힘과 두려움 없는 법장이 있어 모든 중생에 게 대승법을 줄 수 있지만 중생들은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일불승에서 방편으로 삼승을 분별하여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고:법화경 비유품, 불교성전]
초기시대의 불교형태는 부처님께서 오직 해탈하는 실상의 깨달음 법을 말씀하셨지만, 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해탈만을 추구한 경향으로 소승적인 수행을 하였다고 생각하며, 오늘 날의 저희들 역시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늘 하나를 말씀하시지만 그 낙처를 몰라 둘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으니, 거듭 스님께서 수십 수백 번 설명하시며, 사성제와 8정도를 통한 해탈법에 무관심한 불자들을 위해서 방편법으로 정법으로 이끌어 주시려 건강을 상하시며 그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데,... 당시의 부처님께서 너무나 큰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우리 중생들의 어리석고 아둔한 근기를 위하여, 큰 방편법으로 삼승의 해탈법을 가르치시며 만 중생을 구제하려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법을 만났더라도 올바른 정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가는 길이 정도인지 사도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었을 터이고, 또한 나의 두터운 업장, 업력으로 인해 대인을 기피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를 이어 간답시고 선지식의 지도도 무시한 채 행동하며 독각으로 자리(自利)에만 치우쳐 이타(利他)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 자명하기에,
현재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하며 중도의 참 진리인 참 나를 견성하고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참다운 불자가 되려 노력하며 정진하고 있습니다.
#*이 지연 법우 숙제
삼승 - 대승불교에서의 3종류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인간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타는 것, 즉 가르침을 의미한다.
- 대승불교에서는 전불교를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3종으로 나누고, 각각 능력이 다른 3종류의 대상을 위해서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 성문(聲聞)은 가장 능력이 떨어진 것으로, 불의 소리에 이끌려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며, 다음의 연각(緣覺)은 스스로 깨달은 것, 최상위의 보살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체 인간의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성문, 연각은 자리(自利), 보살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한다
- 『법화경』 등에서는 이들 3종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설교가 된 것뿐으로, 그들은 하나의 대승불교로 돌아간다는 일승교(一乘敎)가 강조되었다.
불교와의 인연이 오래되었고 늘 배우는데 욕심이 많았지만 이제야 불교대학을 통해 불법을 제대로 배우게 된것은 불교를 지식으로 습득하는데 그칠까 하는 염려도 있었고 인연이 깊은 어느 스님의 공부를 많이 하고자 하는 것도 집착이다 라고 하신 말씀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학장 스님과 보현사와의 인연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더 어릴때 불법을 배우려고 했다면 아마 성문승에 기반해 지식적인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데 치중하지 않았을까 싶고, 미국에 하필이면 달라스에 와서 보현사를 나오게 되면서 보살도를 실천하고자 늘 노력하는 법우들을 만나고 죽은 법이 아닌 실천하는 법을 늘 강조하시는 대학장 스님을 만나 삼승을 각각 따르기 보다 이를 다 아우르는 일승교를 배우고 실천하는 기반을 닦게 된것 같습니다.
저는 일승교의 삼승이 결국 하나로 대승불교로 돌아간다는 말이 와 닿았는데 필요에 의해 삼승을 나누어 설명했지만 결국 이들은 불성을 깨닫고자 하는 '원'을 다른 각도로 설명하는 것이지 나 하나의 깨달음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나아가 중생을 돕고 구제하는 길을 걷게 될 것 같습니다. 경을 읽다 보면 마지막에 기도한 공덕을 중생에게 나누고 다 함꼐 성불하자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런 경을 읽고 불성을 깨닫는것 자체가 곧 보살도를 실현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대를 다니며 교리를 배워가면서 마음도 좀 더 너그러워지고 화도 줄어 들고 무엇보다 자비심이 조금은 더 생겨남을 경험하면서 지식을 알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보살도로 가는 첫 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여담으로… 이번 숙제를 학기 초반이 아니라 막바지에 내주신 학장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숙제들이 다 연결되어 있었구나 하는걸 깨달았습니다. - [*참조: 종교학대사전]
#*보장화 숙제 올립니다_()_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합니다. 삼승은 원래의 의미는 석가모니 당시의 제자들을 말한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중생의 제도를 근본으로 삼는 보살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각됨에 따라 성문은 소승에 속하게 되었답니다. 대승경전인 법화경, 화엄경,승만경 등에선 3승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 방편으로 궁극적으로 일승으로 가기위한것 이며, 특히 일승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이라 합니다. 3승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을 일겉습니다.
1. 성문승 : 부처님의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 수행하는 사람으로 성문의 목표인 아라한과를 얻고자 무한히 오랜기간 사제를 닦아 열반을 증득합니다. 자기의 깨달음과 완성만을 구하고 힘쓰는 출가승이나 성자가 성문승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행의 단계와 경지를 나타내는 4가지를 사향사과 (수다원, 사다함,아나함, 아라한)라 합니다.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 비로소 진리를 추구하는 흐름에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예류预流(흐름에 들어오다란 의미)의 수다원, 한 번 천계나 인간계에 태어난 후 수행으로 소멸시켜야할 욕계의 9종의 번뇌중 6종을 끊어내어 그 이후로 천계나 인간계에서 태어나는 일이 없어진 성자의 경지로 일래과一来果 혹은 사다함이라 합니다. 다음은 아나함으로 이 성자는 색계, 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다하여 불환이라하여 不還果를 얻은 경지를 말합니다. 소승 수행자들의 최고의 이상상인 아라한 입니다. 나한 이라고도 하며, 불제자들이 도달할수 있는 최고의 계위로 더이상 배우고 갂을게 없다하여 무학이라 하며,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분-응공,진리에 상응하는 분- 응진,모든 번뇌를 없앤-살적殺贼등으로 불리웁니다. 아라한은 성자 즉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여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의 획득한 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분이십니다.
2.연각 : 독각이라고도 하며, 스스로 연기의 이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 지위는 보살의 아래 성문의 위라 합니다.
3. 보살 : 부처님 전생에 수행하시던 시절 수기를 받은 이후의 몸을 보살이라 불렀으며,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 상이기도 합니다. 자리 이타를 행하며, 육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을 구합니다.
삼승을 정리하면서, 발원의 중요성과 깨달음의 과의 크기와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같은 노력과 시간투자와 능력이 다 같은 상황이라 가정하더라도 성문의 아라한과나 연기법의 깨달음에 대한 발원만을 하면 나만의 깨침에서 그 결과를 얻을 것이고, 나아가 모든 이들도 깨닫게 하겠다는 발원이 보살행이란 행으로 아어질 수 있고 결과도 나만이 아니 우리가 될수있게 한다는 것 입니다. 끊임없는 보살행의 발원이 너무 중요하단 생각이 드네요. 어떤 법문 이었는데, 평생을 선방에서 수행을 열심히 하신 수좌스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깨닫겠다고, 공부를 지금까지 해왔는데, 보살도의 맘 한 번 못내보고 머리가 희어졌다"는 탄식을 하셨다는 말씀에서 시사하는 바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그렇게 공부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세상이 정화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강의 물풀 같은 존재들 이랄까요. 강의 오염을 막고, 맑히는 그래서 아주 귀한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괴로움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나의 현 수준데로 정법에 근거해서 정념이 확립된 수행자가 완전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보살행을 행하는 맘을 갖을때 좀 더 빨리 불국정토가 되리란 생각을 해 봅니다. 내 개인만의 발원보다, 나와 모든 사람에 대한 발원으로 하는 보살행엔 +알파힘이 생기는것 같습니다. 보살행을 하는 스님이나 수행자들을 볼때 어쩜 저런 힘이 나오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이 아닌 우리란 발원과 보살행에선 한 개인의 능력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현주소는 성문의 맘과 보살도를 지향하는 맘이 섞여 있는것 같습니다. 대승불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말을 명심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마하살_()_
#*백련화 숙제를 올립니다.
불교의 삼승(三乘)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세 가지 주요 경로를 의미합니다. 이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맞는 수행 방법을 제공하여 불교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경로가 하나로 통합되어 일승(一乘)에 도달합니다.
첫 번째는 성문승(聲聞乘)입니다. 이는 경전을 듣고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해탈을 목표로 합니다. 성문승은 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깨달음을 얻는 데 중점을 둡니다.
두 번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자연의 이치와 인연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연각승은 고독한 수행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자각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연각승은 때로 벽지불(辟支佛)로도 불리는데, 벽지불은 외부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저도 오래전에 벽지불이라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세 번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이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길로, 자비와 이타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보살승은 개인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세 가지 경로는 각기 다른 수행 방법을 제시하지만, 모두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경로는 결국 하나의 승(一乘)으로 통합되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삼승이 일승으로 통합된다는 것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경전 공부를 하면서 여러 스님들의 말씀을 따라서 기도나 경전 읽기를 해보았습니다. 이후에는 항상 이근원통법으로 경전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마음 닦는 게 너무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이가 항상 마음을 흔들어서, 때로는 나 혼자 인연 연기를 공부하니 이렇게 힘이 드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이들이 모두 같이 마음 공부를 하고, 서로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그러다가 팬데믹 시대에 보현행원품의 가르침은 자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주었고,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요즘에는 화엄경을 직접 참여하는 수업 형태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살행으로 이 모든 기도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친한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함께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더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안타깝고, 함께 공부하지 않는 친한 이를 생각하면 울컥 눈물이 나고 속상합니다. -[*참조 : 불교신문 불교신문 일승(一乘) 삼승(三乘), 현대불교 삼승법을 설한 ‘위음왕불’
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덕현 숙제 올립니다.
승(乘)이란 타고 가는 것으로, 중생을 실어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일승은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이들을 구제하는 교법은 하나뿐이고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을 말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나 소질에 맞게 셋으로 나누어서 설한 것이다. 삼승에는 성문승(聲問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성문승은 ‘소리를 듣는 것을 탄다’라는 의미로,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이다. 연각승이란 ‘인연(因緣)을 깨닫는 것을 탄다’라는 뜻으로 12인연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12인연법을 관(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교법으로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부른다. 보살승이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특히 보살승은 많은 사람들을 부처가 되게 해 불승이라고도 한다. 이 중 이승(二乘)이라고 불리는 성문승과 연각승은 혼자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해 소승불교로,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법화경〉에서는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 등 각각의 고유한 실천법이 있다고 하는 삼승의 견해에 대해, 삼승은 일승으로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
위는 삼승을 설명한 글을 찾은 것이고
다음은 법화경 방편품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부처님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시는 법이며 여러 가지 하시는 일은 항상 중생과 세상을 위함이니, 오직 부처님의 지혜를 중생에게 보여 깨닫게 하심이니라.
사리불아, 부처님은 오직 일불승으로 모든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이 가르침을 설하실 뿐 다른 법은 없거늘, 어찌 이승이 있고 삼승이 있겠느냐.
사리불아, 모든 시방세계에 계신 여러 부처님 의 법도 이와 같으니라.
사리불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씀으로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셨으니, 이 가르침도 일체중생을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하는 일불승을 위한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여러 부처님을 따라 섬기며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받들어 듣고는 그 법대로 실천하여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었느니라. 사리불아, 미래에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더라도 역시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씀으로 중생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시리니, 이 법도 다 중생들을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하는 일불승을 위한 것이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을 따라 법을 받들어 듣고는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으리라.
사리불아, 현재 시방의 한량없는 백천만억 부처님 국토 중에 계시는 여러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많은 행복과 안락을 베풀고 계시나니 이 모든 부처님도 한량없고 셀 수 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씀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고 계시느니라. 이 법도 또한 부처님이 되는 길인 일불승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을 따라 섬기면서 법을 받들어 듣고 행하여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게 되느니라.
사리불아, 이 모든 부처님은 오직 보살을 교화하시니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 중생에게 보이고자 하심이며, 부처님의 지혜로 중생들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심이니라.
사리불아, 나도 지금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지가지 탐욕과 마음 속 깊이 집착함이 있음을 알기에 그 본성을 따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씀과 방편의 힘을 가지고 법을 설하느니라.
사리불아, 이렇게 함은 모두 부처님이 되는 길인 일불승과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게 하고자 함이니라." - [*인용 "법화경. 방편품에서]
오랜만에 다시 법화경을 보니 예전에 스님께 법화경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로 들어가 깨닫게 하고자 하심"이라는 것이 이 공부의 핵심이라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실천과 행동하는 수행으로 오로지 정법만을 공부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임을 배웁니다.
이 것을 몰랐다면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 전에 떠난 오천명의 증상만자들 중 하나이었을 것같습니다.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을 말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나 소질에 맞게 셋으로 나누어서 설한 것이다. 삼승에는 성문승(聲問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성문승은 ‘소리를 듣는 것을 탄다’라는 의미로,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이다.연각승이란 ‘인연(因緣)을 깨닫는 것을 탄다’라는 뜻으로 12인연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12인연법을 관(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교법으로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부른다.보살승이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특히 보살승은 많은 사람들을 부처가 되게 해 불승이라고도 한다. 이 중 이승(二乘)이라고 불리는 성문승과 연각승은 혼자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해 소승불교로,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법화경〉에서는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 등 각각의 고유한 실천법이 있다고 하는 삼승의 견해에 대해, 삼승은 일승으로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불교신물>
어느 날 부자가 외출한 사이에 철모르는 아이들이 노는 집에 불이 났다. 아이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뛰어노는데 정신이 없자, 아버지는 한 가지 비책을 생각하였다. 아이들이 평소에 원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문밖으로 나와서 마음대로 가지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들은 좋아하면서 모두 문밖으로 나왔다. 우선 아이들은 불난 집에서 피난한 것이다. 그러나 문밖에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아닌 큰 흰 소가 끄는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약속한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대신 이 세상에도 드문 큰 흰 소가 끄는 훌륭한 수레를 선사한 것이다. 아이들은 뜻하지도 않았던 큰 수레를 선물로 받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것이 화택삼거의 비유 설화이다.
이 이야기 속의 부자인 아버지는 부처, 아들들은 성문연각의 소승, 불난 집은 고해인 이 세상, 세 가지 수레는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법, 한 큰 흰 소의 수레는 일불승법이다. 부처는 생사의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은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법을 방편으로 베풀었지만, 결국에는 일불승법이란 진실한 가르침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출처 법화경>
♧•개인고찰
이번 삼승에 대해 공부하면서-
고해를 건너 큰 불국토에 이르는 큰지혜를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방편을 각 중생의 근기에 맞게 배풀어주신 부처님의 자비심에 큰 감복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펼치시던 약 2600년 전에도 여러형태의 수행법과 기도법이 있었는데 한가지 (오직 일승)법으로 강제 통합하신 것이 아닌 각자의 수행에 맞는 방편으로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 궁극의 목표는 대승의 일승으로 향하게 하시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
지장경을 읽다 보면 각자의 근기에 따라
구제하는 것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라고 하셨습니다. 큰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그물에 걸린 줄도 모르고 신나게 헤엄치며 순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저는 현재의 삶이 환 이라 배우고 들으면서도 알아차리기를 못하고 순간의 착각에 집착하여 다시 괴로움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 안일한 생각으로 '이번 생에 못하면 다음생에 하지!!!!' 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조금씩 이라도 발전하는 생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성불할 수 있겠지!!! 라는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살았던 지난날을 참회 합니다.
기필코 다음 생은 하품하생일지라도 아미타극락세계 성불학교에 입학하여지길 발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자성화(신은영)
1.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사성제(四聖諦)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궁극에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2. 연각승(緣覺乘, pratyekabuddhayāna)은 독각승(獨覺乘) 혹은 벽지불승(辟支佛乘)이라고도 하며,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고, 홀로 은둔하여 12연기를 직접 관하여 깨달음을 얻습니다.
3. 보살승(菩薩乘, bodhisattvayāna)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下化衆生]는 보살행을 의미합니다.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며 자리이타를 수행합니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오직 자신만의 불도를 이루고자 하여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에 소승(小乘)이라 폄칭하고 보살승은 자신이 불도를 이루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두루 구제하는 것에 힘쓰기 때문에 대승(大乘)이라고 합니다.
다만, 법화경 비유품에서 부처님께서는 화택의 비유를 통해, 삼승도 방편이요, 오직 일승의 깨달음만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삼승에 대해 찾아보고, 제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출가하여 승속에 들어간 것도 아니요, 산속에 은둔하여 도를 닦고 있지 않는 이상, 세속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배우며 수행하는 우리들은 모두다 보살승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 자식, 형제를 비롯한 가족 관게며, 회사 상사, 동료, 친구등등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 속에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하는 우리 도반들은 모두 보살승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법을 만나 잘 살고 있는 것도 수많은 불보살님들의 보이지 않는 가피속에 살고 있구요.
물론 홀로 멀리 떠나, 아니면 집에서라도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독각승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엔 마음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가끔은 나만을 돌아보며 오롯이 수행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결국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남을 위하는 것이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성문의 수행과, 혼자 오롯이 들여다보는 연각의 수행, 자비를 행하는 보살의 수행이 모두 다 필요하지 않을까요? 결국에는 깨달아야 한다는…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법보신문 - 현진스님의 어원으로 보는 불교, 26 성문
네이버블로그 -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묘법연화경
#*원산(안학선)
숙제를 올립니다.
'삼승'이라함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대한 세가지 교법이며 "승" 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수레에 비유한다.
"성문승"은 4제현관 즉 고제,집제,멸제,도제 사성제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며, 열반을 증득하는 수행으로써 이타는 고려하지 않고 자리( 자신을 이롭게) 에만 치중 하는 일들을 말한다.
또 한 성문은 아공의 이치만을 깨달을 뿐 법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며 중생이 참다운 나라고 주장하는 실아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기본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 뿐 영원 불멸의 참된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깨닫지만, 이 세상의 모든것이 인연이 모여서 생겨났으므로 절대의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은(법공)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문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여열반을 증득하기는 하지만 그 아 가 법의 일부요, 아와 법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혼자만의 해탈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문으로서 해탈하는 길은 성문4과 라고 하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4단계를 설정하고있다.
수다원은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육진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이 번뇌가 없는 행을 닦는 것이며, 사다함은 욕망을 모두 버리고 번뇌를 끊었으므로 천상과 인간으로 태어나는 왕복 과정을 거쳐 완전히 해탈한다는 것이며, 아나함은 욕심을 벗어나서 다시는 욕심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뜻하고, 아라한은 끊어야 할 번뇌가 없고 떠나야 할 탐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없으며 분별이 없고 해탈의 경지에 있는 성자를 뜻한다.
" 연각승"은 12연기를 현관 하며, 또는 독각이라고도 하고 스승에 의하지 않하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이치를 관하여 혼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나 타내는 말이며, 성문과 마찬가지로 자리(자신을
이롭게) 에만 치중하는 이를 말한다.
"보살승"은 6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며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를 음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보디는 "깨닫다" 사트바는 "존재" 즉 보리살타는 깨달은! 존재 이다.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은 <선가귀감>에서 성문은 고요한데 머무는 것으로써 수행을 삼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니 귀신이 보게된다. 그러나 보살은 성품이 본래부터 빈 것임을 깨달아 그 마음이 스스로 고요하므로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으니 의도와 마군들이 보지를 못한다 고 하였다.
보살은 중생을 위한 실천이 있고, 성문은 아공의 이치만을 깨달을 뿐, 법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 하였다. 아공의 실아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기본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 뿐 영원불변의 참된 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법공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 모여서 생겼으므로 절대의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님 제자이지만 보살은 중생을 위한 실천이 있고, 성문은 자기의 해탈에 치중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선문승,연각승을 2승이라 라고한다. 소승불교 2승에 대해서 대승불교가 스스로 입장을 나타낸 것이 일불승 이다. 일불승은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직 한가지로서 그 가르침에 의해서 어떠한 사람들도 똑 같이 성불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승의 도에 따르는 수행하는 모두 보살의 이름으로 불리고 부처님의 전생에 무량의 선근공덕을 쌓은 것처럼 대상을 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뒤로 돌리고 우선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타행이 그 임무라고 한다. 그러나 성문• 연각의 2승도 역시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이며 3승의 도를 구별하는 것은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방편설에 불과하며 진실로는 오직 부처의 일승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가 < 법화경의 회삼귀일> 에 의해 강조되며 그것이 일불승의 본의로 되었다.
법화경에는 삼승을 설명하기 위해 네 종류의 수레를 등장 시키고 있다.
"성문"에 비유한 첫 번째는 양이 끄는 수레인데 힘이 약하다, 그다음 으로 "연각"을 비유한 사슴은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는 없지만 양보다는 힘이 뛰어나다.
세 번째로 "보살" 을 비유한 소가 끄는 수레가 등장한다. 튼튼하고 많은짐을 실어 나를 수가 있다. 네 번째로 "일불승" 으로 비유되는 흰소가 등장하여 뛰어난 힘과 많은 짐을 완벽한 수레로 양과 사슴의 수레의 짐을 모두 실어 나를 수가 있다.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 사상인 일승 또는 일불승이다. [*참고: 위키백과, 우리모두의 백과사전, 네이버 블로그 천석 회삼귀일]
각양각색의 모든 것을 하나로서 귀결 시키는 것이 보리수행이며 알아차림과 깨어있음을 여러차례 스님께서 말씀 하셨지만 일상생활에 익숙해져 있어 자주 놓쳐버리고 생각하기를 반복하면서 그 동안의 숙제들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읍니다. 이번 숙제를 통해서도 보살의 큰 뜻을 다시 한번 새겨 성찰하여 보았읍니다. 보살의 자리이타정신, 요즘 어려운 경제 여건에 상대에게 친절과 배려, 봉사,신뢰,를 하면서 "남을 잘 되게 도와주면 그것이 내가 잘 되는 일이다". 평범 하면서도 진리인 그 뜻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녹야원(이경희)
제가 조사한 삼승법 또한 다른 법우들과 많이 다르지 않아.. 짧게만 정리하고 제 생각을 써 보겠습니다.
1. 성문승: 사성제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얻음.
2. 연각승: 12연기를 직접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음
3. 보살승: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
저의 얕은 검색과 생각으로는 성문승과 연각승의 차이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느냐.. 그렇지 않고 직접 수행해서 깨닫게 되느냐... 사성제를 수행하는 것과 12연기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지 않나 싶은데요…
이번 법문에서 스님께서 다시 한번 강조하신… “행”의 중요성.. 왜 행이 젤 중하냐…^^는 보살승을 저희에게 강조 하시려 하신거 같아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 해 보았습니다. 법화경 사경하며 혼자 이해할때랑 법문을 듣고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또 다시 배우게 됩니다.
작년 초… 시간도 좀 여유 있었고 천일기도의 육바라밀 실천 지침에 따라..^^ 기도하며 가능한 많은 시간을 몸으로 행할 수 있는 봉사를 해보았습니다. 길지는 않은 기간 이였지만 절에서도 외부에서도 기도하며 봉사를 해 보니, 기도만 할때와는 다르게 마음과 몸으로 같이 와닿는 이치들이 있었는데요. 글과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네요 ^^;;;
요즘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정진하려는 노력을.. 글과 말로만 하지말고 실천을 해야할텐데 좌선을 시간내어 하질 못 해… 다른 방편만 우선 쓰고 있습니다. 이동시간이 많기도 하고 몸이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서라도 생각하려 하는데.. ‘아직도 벗지 못하는 저의 고착적인 번뇌를 나는 왜 붙들고 있나… 왜… 그런가… 알면서도 놓지 않는 건 왜인가..’ 답을 알듯하면서 모르는.. 혹은 모른척 하고 싶은 중생심으로 목적지를 설정 해 놓고도 저 멀리 돌아가는 중입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법연화경, 및 스님 일요법문]
#*정명(正明) 글 올립니다.
삼승(三乘)에 대한 나의 생각.
부처님이 사리풋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인용해 본다면 "어떤 중생이 안으로 지혜가 있어 여래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삼계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열반을 구한다면 이를 성문승 (聲聞乘)이라 하고,
어떤 중생이 여래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연의 지혜를 구하고,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고요한 곳을 즐기며 모든 법의 인연을 깊이 알면 이를 독각승(독각승)이라 하고,
또 어떤 중생이 여래의 법을 듣고 믿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체지(一切智)와 불지(佛智)와 자연지(自然智)와 무사지(無師智)와 여래의 지견과 두려움 없음을 구하고, 한량없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들을 편안케 하며, 세상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그들을 제도하면 그를 대승보살(大乘 菩薩)이라 한다" 고 하시면서 법화경의 유명한 삼계화택에 비유하였습니다.
장자가 처음에는 세가지 수레로써 아이들을 구했고, 그 뒤에는 수많은 보배로 장식된 으뜸가는 큰 수레를 주었습니다, 여래께서도 처음에는 삼승으로 중생을 인도하다가 나중에는 대승으로서 제도하여 해탈케 합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한량없는 지혜와 힘과 두려움 없는 법장이 있어 모든 중생에 게 대승법을 줄 수 있지만 중생들은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일불승에서 방편으로 삼승을 분별하여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고:법화경 비유품, 불교성전]
초기시대의 불교형태는 부처님께서 오직 해탈하는 실상의 깨달음 법을 말씀하셨지만, 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해탈만을 추구한 경향으로 소승적인 수행을 하였다고 생각하며, 오늘 날의 저희들 역시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늘 하나를 말씀하시지만 그 낙처를 몰라 둘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으니, 거듭 스님께서 수십 수백 번 설명하시며, 사성제와 8정도를 통한 해탈법에 무관심한 불자들을 위해서 방편법으로 정법으로 이끌어 주시려 건강을 상하시며 그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데,... 당시의 부처님께서 너무나 큰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우리 중생들의 어리석고 아둔한 근기를 위하여, 큰 방편법으로 삼승의 해탈법을 가르치시며 만 중생을 구제하려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법을 만났더라도 올바른 정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가는 길이 정도인지 사도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었을 터이고, 또한 나의 두터운 업장, 업력으로 인해 대인을 기피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를 이어 간답시고 선지식의 지도도 무시한 채 행동하며 독각으로 자리(自利)에만 치우쳐 이타(利他)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 자명하기에,
현재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하며 중도의 참 진리인 참 나를 견성하고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참다운 불자가 되려 노력하며 정진하고 있습니다.
#*이 지연 법우 숙제
삼승 - 대승불교에서의 3종류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인간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타는 것, 즉 가르침을 의미한다.
- 대승불교에서는 전불교를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3종으로 나누고, 각각 능력이 다른 3종류의 대상을 위해서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 성문(聲聞)은 가장 능력이 떨어진 것으로, 불의 소리에 이끌려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며, 다음의 연각(緣覺)은 스스로 깨달은 것, 최상위의 보살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체 인간의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성문, 연각은 자리(自利), 보살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한다
- 『법화경』 등에서는 이들 3종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설교가 된 것뿐으로, 그들은 하나의 대승불교로 돌아간다는 일승교(一乘敎)가 강조되었다.
불교와의 인연이 오래되었고 늘 배우는데 욕심이 많았지만 이제야 불교대학을 통해 불법을 제대로 배우게 된것은 불교를 지식으로 습득하는데 그칠까 하는 염려도 있었고 인연이 깊은 어느 스님의 공부를 많이 하고자 하는 것도 집착이다 라고 하신 말씀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학장 스님과 보현사와의 인연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더 어릴때 불법을 배우려고 했다면 아마 성문승에 기반해 지식적인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데 치중하지 않았을까 싶고, 미국에 하필이면 달라스에 와서 보현사를 나오게 되면서 보살도를 실천하고자 늘 노력하는 법우들을 만나고 죽은 법이 아닌 실천하는 법을 늘 강조하시는 대학장 스님을 만나 삼승을 각각 따르기 보다 이를 다 아우르는 일승교를 배우고 실천하는 기반을 닦게 된것 같습니다.
저는 일승교의 삼승이 결국 하나로 대승불교로 돌아간다는 말이 와 닿았는데 필요에 의해 삼승을 나누어 설명했지만 결국 이들은 불성을 깨닫고자 하는 '원'을 다른 각도로 설명하는 것이지 나 하나의 깨달음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나아가 중생을 돕고 구제하는 길을 걷게 될 것 같습니다. 경을 읽다 보면 마지막에 기도한 공덕을 중생에게 나누고 다 함꼐 성불하자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런 경을 읽고 불성을 깨닫는것 자체가 곧 보살도를 실현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대를 다니며 교리를 배워가면서 마음도 좀 더 너그러워지고 화도 줄어 들고 무엇보다 자비심이 조금은 더 생겨남을 경험하면서 지식을 알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보살도로 가는 첫 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여담으로… 이번 숙제를 학기 초반이 아니라 막바지에 내주신 학장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숙제들이 다 연결되어 있었구나 하는걸 깨달았습니다. - [*참조: 종교학대사전]
#*보장화 숙제 올립니다_()_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합니다. 삼승은 원래의 의미는 석가모니 당시의 제자들을 말한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중생의 제도를 근본으로 삼는 보살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각됨에 따라 성문은 소승에 속하게 되었답니다. 대승경전인 법화경, 화엄경,승만경 등에선 3승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 방편으로 궁극적으로 일승으로 가기위한것 이며, 특히 일승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이라 합니다. 3승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을 일겉습니다.
1. 성문승 : 부처님의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 수행하는 사람으로 성문의 목표인 아라한과를 얻고자 무한히 오랜기간 사제를 닦아 열반을 증득합니다. 자기의 깨달음과 완성만을 구하고 힘쓰는 출가승이나 성자가 성문승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행의 단계와 경지를 나타내는 4가지를 사향사과 (수다원, 사다함,아나함, 아라한)라 합니다.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 비로소 진리를 추구하는 흐름에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예류预流(흐름에 들어오다란 의미)의 수다원, 한 번 천계나 인간계에 태어난 후 수행으로 소멸시켜야할 욕계의 9종의 번뇌중 6종을 끊어내어 그 이후로 천계나 인간계에서 태어나는 일이 없어진 성자의 경지로 일래과一来果 혹은 사다함이라 합니다. 다음은 아나함으로 이 성자는 색계, 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다하여 불환이라하여 不還果를 얻은 경지를 말합니다. 소승 수행자들의 최고의 이상상인 아라한 입니다. 나한 이라고도 하며, 불제자들이 도달할수 있는 최고의 계위로 더이상 배우고 갂을게 없다하여 무학이라 하며,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분-응공,진리에 상응하는 분- 응진,모든 번뇌를 없앤-살적殺贼등으로 불리웁니다. 아라한은 성자 즉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여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의 획득한 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분이십니다.
2.연각 : 독각이라고도 하며, 스스로 연기의 이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 지위는 보살의 아래 성문의 위라 합니다.
3. 보살 : 부처님 전생에 수행하시던 시절 수기를 받은 이후의 몸을 보살이라 불렀으며,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 상이기도 합니다. 자리 이타를 행하며, 육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을 구합니다.
삼승을 정리하면서, 발원의 중요성과 깨달음의 과의 크기와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같은 노력과 시간투자와 능력이 다 같은 상황이라 가정하더라도 성문의 아라한과나 연기법의 깨달음에 대한 발원만을 하면 나만의 깨침에서 그 결과를 얻을 것이고, 나아가 모든 이들도 깨닫게 하겠다는 발원이 보살행이란 행으로 아어질 수 있고 결과도 나만이 아니 우리가 될수있게 한다는 것 입니다. 끊임없는 보살행의 발원이 너무 중요하단 생각이 드네요. 어떤 법문 이었는데, 평생을 선방에서 수행을 열심히 하신 수좌스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깨닫겠다고, 공부를 지금까지 해왔는데, 보살도의 맘 한 번 못내보고 머리가 희어졌다"는 탄식을 하셨다는 말씀에서 시사하는 바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그렇게 공부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세상이 정화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강의 물풀 같은 존재들 이랄까요. 강의 오염을 막고, 맑히는 그래서 아주 귀한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괴로움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나의 현 수준데로 정법에 근거해서 정념이 확립된 수행자가 완전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보살행을 행하는 맘을 갖을때 좀 더 빨리 불국정토가 되리란 생각을 해 봅니다. 내 개인만의 발원보다, 나와 모든 사람에 대한 발원으로 하는 보살행엔 +알파힘이 생기는것 같습니다. 보살행을 하는 스님이나 수행자들을 볼때 어쩜 저런 힘이 나오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이 아닌 우리란 발원과 보살행에선 한 개인의 능력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현주소는 성문의 맘과 보살도를 지향하는 맘이 섞여 있는것 같습니다. 대승불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말을 명심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마하살_()_
#*백련화 숙제를 올립니다.
불교의 삼승(三乘)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세 가지 주요 경로를 의미합니다. 이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맞는 수행 방법을 제공하여 불교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경로가 하나로 통합되어 일승(一乘)에 도달합니다.
첫 번째는 성문승(聲聞乘)입니다. 이는 경전을 듣고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해탈을 목표로 합니다. 성문승은 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깨달음을 얻는 데 중점을 둡니다.
두 번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자연의 이치와 인연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연각승은 고독한 수행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자각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연각승은 때로 벽지불(辟支佛)로도 불리는데, 벽지불은 외부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저도 오래전에 벽지불이라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세 번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이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길로, 자비와 이타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보살승은 개인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세 가지 경로는 각기 다른 수행 방법을 제시하지만, 모두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경로는 결국 하나의 승(一乘)으로 통합되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삼승이 일승으로 통합된다는 것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경전 공부를 하면서 여러 스님들의 말씀을 따라서 기도나 경전 읽기를 해보았습니다. 이후에는 항상 이근원통법으로 경전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마음 닦는 게 너무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이가 항상 마음을 흔들어서, 때로는 나 혼자 인연 연기를 공부하니 이렇게 힘이 드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이들이 모두 같이 마음 공부를 하고, 서로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그러다가 팬데믹 시대에 보현행원품의 가르침은 자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주었고,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요즘에는 화엄경을 직접 참여하는 수업 형태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살행으로 이 모든 기도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친한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함께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더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안타깝고, 함께 공부하지 않는 친한 이를 생각하면 울컥 눈물이 나고 속상합니다. -[*참조 : 불교신문 불교신문 일승(一乘) 삼승(三乘), 현대불교 삼승법을 설한 ‘위음왕불’
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덕현 숙제 올립니다.
승(乘)이란 타고 가는 것으로, 중생을 실어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일승은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이들을 구제하는 교법은 하나뿐이고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을 말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나 소질에 맞게 셋으로 나누어서 설한 것이다. 삼승에는 성문승(聲問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성문승은 ‘소리를 듣는 것을 탄다’라는 의미로,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이다. 연각승이란 ‘인연(因緣)을 깨닫는 것을 탄다’라는 뜻으로 12인연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12인연법을 관(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교법으로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부른다. 보살승이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특히 보살승은 많은 사람들을 부처가 되게 해 불승이라고도 한다. 이 중 이승(二乘)이라고 불리는 성문승과 연각승은 혼자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해 소승불교로,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법화경〉에서는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 등 각각의 고유한 실천법이 있다고 하는 삼승의 견해에 대해, 삼승은 일승으로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
위는 삼승을 설명한 글을 찾은 것이고
다음은 법화경 방편품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부처님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시는 법이며 여러 가지 하시는 일은 항상 중생과 세상을 위함이니, 오직 부처님의 지혜를 중생에게 보여 깨닫게 하심이니라.
사리불아, 부처님은 오직 일불승으로 모든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이 가르침을 설하실 뿐 다른 법은 없거늘, 어찌 이승이 있고 삼승이 있겠느냐.
사리불아, 모든 시방세계에 계신 여러 부처님 의 법도 이와 같으니라.
사리불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씀으로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셨으니, 이 가르침도 일체중생을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하는 일불승을 위한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여러 부처님을 따라 섬기며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받들어 듣고는 그 법대로 실천하여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었느니라. 사리불아, 미래에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더라도 역시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씀으로 중생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시리니, 이 법도 다 중생들을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하는 일불승을 위한 것이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을 따라 법을 받들어 듣고는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으리라.
사리불아, 현재 시방의 한량없는 백천만억 부처님 국토 중에 계시는 여러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많은 행복과 안락을 베풀고 계시나니 이 모든 부처님도 한량없고 셀 수 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씀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고 계시느니라. 이 법도 또한 부처님이 되는 길인 일불승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을 따라 섬기면서 법을 받들어 듣고 행하여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게 되느니라.
사리불아, 이 모든 부처님은 오직 보살을 교화하시니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 중생에게 보이고자 하심이며, 부처님의 지혜로 중생들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심이니라.
사리불아, 나도 지금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지가지 탐욕과 마음 속 깊이 집착함이 있음을 알기에 그 본성을 따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씀과 방편의 힘을 가지고 법을 설하느니라.
사리불아, 이렇게 함은 모두 부처님이 되는 길인 일불승과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게 하고자 함이니라." - [*인용 "법화경. 방편품에서]
오랜만에 다시 법화경을 보니 예전에 스님께 법화경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로 들어가 깨닫게 하고자 하심"이라는 것이 이 공부의 핵심이라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실천과 행동하는 수행으로 오로지 정법만을 공부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임을 배웁니다.
이 것을 몰랐다면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 전에 떠난 오천명의 증상만자들 중 하나이었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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