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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20, 도를 배우는 이는, 의심으로 시작해서 의심이 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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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18-06-23 15:26 조회22,4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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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에는 주재하는 ‘나’없다” 

몸은 ‘지수화풍’ 임시로 화합
그안에 ‘나’라는 근거 없는데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나
시작도 끝도 없는 근본자리
입놀리지 말고 얘기해봐라
입을써도 쓴 바 없음을 알면
남한테 그 소식 전할 수 있다
‘성문·연각’깨달음 혼자즐겨
남을 제도하는데 한계있어
불보살 가까이해 지혜 얻길
일체를 여읠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여읠 것도, 취할 것도 없는 것이 마음자리다. 그런데 거기에 업식이 붙어서, 때가 묻었다고 하는 것이다. 때가 묻었다는 것도 착각이다. 본래 때 묻은 적이 없는데, 그림자가 자기도 모르는 순간 만들어지면서 그 속에서 버무려지는 것을 반복하는 윤회의 삶을 짓고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윤회를 한 적이 없다. 윤회하는 모습에 속으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것이고, 본래 열반의 참다운 실상을 바로 눈떠서 윤회한 적이 없음을 알면 아무리 어지러운 속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자세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4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4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주인공’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상相에 얽매여 그냥 그것이 된 채, 괴로움을 다할 기약이 없을 뿐 아니라, 도무지 자기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대로 믿으라고 한다고 해서, 안목(견해, 관점)을 바꾸지 않고 말만 배워서는 곤란하다. 근원을 꿰뚫어 반야의 눈을 갖추고 있는 분의 점검을 받지 않은 채, 말만 배워서 쓴다고 한들...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일체 변화하는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근본 실상에 눈떠야만이, 나도 속지 않고 남도 속이지 않는 인연을 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5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5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이 몸뚱이가 내 것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요,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흔히 ‘오온(五蘊)’이라고도 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음을 마음으로 삼지만, 그것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다만, "소소영영 지각하는 이것이 뭣꼬?"하고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음알이로만 매달려 쪼개고 들어가면 영원히 쪼개질 뿐이어서, 찾는 데만 세월을 다 보내는 어리석은 수행을 하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이론, 지식을 바탕한 알음알이에만 매달리지 말고 실제로 눈뜨게 해줄 수 있는 선지식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해설하는 것이 모두 임제스님이 말씀하신 3구법문(三句法門)이다. 3구에서 깨치면 자기도 제도 못한다고 했다. 이치만 가르치고 이치만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펄떡 펄떡 살아 있는 자기 의문, 자기 의심인 활구(活句)로 전환해서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뭐꼬?” 같은 이구(二句)에서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은 될 만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뼈저린 의심 끝에 선지식의 방과 할에 힘입어 온몸으로 계합할 때는, 일구(一句) 도리에서 안목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조사스님네는 이것 조차도 자취를 끊는 말후구(末後句)까지 이야기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근본 실상 자리를 입 놀리지 말고 이야기해봐라!”는 물음앞에 맞딱뜨렸을 때, 입을 써도 쓴 바가 없다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말할 수 있어야 그 까닭을 소화하고 남한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왕좌왕하다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헤매는 사이에 끝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도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의 ‘없다’는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는 개념과는 다른 차원의 ‘없다’이다. 같은 청정(淸淨)이라도 일반론적 청정과 종교론적 청정이 다르듯이, ‘없다’하는 말도 표현만 같이 할 뿐이지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조주의 무(無)자’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육근·육진·육식이 화합하고 생멸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18계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다.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이어서 호호탕탕 청정하다

 한 생각 돌이켜보니까,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6근과 색 성 향 미 촉 법의 6진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6식이라는 18가지 인식론적 구성요소가 모두 그림자로 본래 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이 있다. 즉 4대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게 하는 것이 ‘지혜의 양식’이다. 반면에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문·연각·벽지불은 소승 계열의 수행자로 혼자 수행해서 깨달은 이들이다. 본인 혼자만 깨달음을 즐기는 소승의 입장을 넘어서,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해줄 수 있는 불보살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보살은 남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만, 성문·연각은 자기 공부는 해도 남을 제도하기는 실로 한계가 있다. 어쩌다 한, 둘을 깨닫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내려갈 수 있는 인연은 아니다. 그러나 불보살은 원력을 바탕으로 한 방편이 출중해서, 성문·연각이 베푸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그러므로 스스로 눈뜬 바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근거를 지닐 때까지, 불보살의 법력을 가까이 하면서 지혜로움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낸다면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진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나누려고 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힘이 생기지만, 생각을 불러일으켜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는 것은 다 업에 불과하다. 이 정도 수준의 나눔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 재산을 보시하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결코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나눔은 이러한 나눔을 초월한 나눔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남과 이익을 나누려면, 먼저 안목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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