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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은 능동적이면 적극적인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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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oBama 작성일13-10-19 19:55 조회29,6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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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2013년 10월16일 달라스 보현사에서 있었던 수요참선 시간에 지암스님께서 말씀 해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 입니다. 제가 옮기는 과정중에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과 본의 아니게 다르게 옮겨 졌을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혹시 내용을 읽어 보시고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암스님께 질의를 하셔서 잘못된 점은 정정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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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스님께서 지난 10월 13일에 큰스님들을 모시고 가졌던 법회 질의/응답 시간에 나왔던 내용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에 대한 정리입니다.>

질문중 하나가 관(觀)하는 방법을 물어보고 번뇌가 소멸되는 것에 대해서 궁금해 했었습니다. ‘마음 번뇌가 일어나되 관(觀)을 통해서 밖으로 행동과 말로 이어지지 않게 하고’라고 물어봤었죠.  제가 회광반조(回光反照)라는 말을 했었죠.  내가 무슨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 생각을 따라 흘러가는것은 그 빛을 따라 움직이는거지만, 그 생각 일어남을 보는것을 알아차리는 게 바로 관(觀)입니다. 그렇게 관(觀)을 하면서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이 ‘이뭣고’ 하다보면 생각의 카르마 (Karma)가 진행을 멈추게 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번뇌가 끊어지나요?  ‘이뭣고’ 한다고 번뇌가 끊어지나요?  번뇌는 계속 올라옵니다. 

선방(禪房)에서는 화두 하나 호흡 하나 지켜보는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참(實參)을 하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회광반조를 진지하게 끊임없이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 수행법이 과연 어떤가, 어디까지 해결을 할 수 있을건가’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는 겁니다.  십이연기의 관이 연결 고리를 끊기만 하고 무명을 타파할 것인가 못할건이가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이 그에 답은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내가 체험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을 압니다.  체험하는 방법중에서 제가 주창하는 것이 간화선(看話禪) 입니다.  화두를 들어라, 화두를 통해서 의정(疑情)을 만들어 가라는 거죠.

지난 일요 법회에서 큰스님께서 장황하게 말씀을 하셨지만, 분명히 그 말씀중에 낙처(落處)가 있었습니다.  풍랑속에 있는 배에 탄것으로 비유하시면서, 본자리 즉 우리의 깨달음의 자리에서 단계를 논해 주셨잖아요.  처음에는 안빠질려고 발버둥을 치는 단계가 있었죠.  그런데, 그 안에 빠져서 허욱적거리는것도 아예 모르는 단계도 있겠죠.  안 빠질려고 애를 쓰는 단계도 있고요.  빠져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단계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빠져도 완전히 노는 단계, 즉 빠져도 그만 나와도 그만인 단계도 있었습니다.  큰스님 법문 말미에 ‘안심 불여 정심, 정심 불여 무심 (安心不如定心, 定心不如無心)’ 이라 하셨습니다.  도반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 들으셨나요?  상중하 근기를 맞춰 생각해보면, 제 생각엔 큰스님께서 우리의 근기를 고려해서 하단계로 해 주신것 같았습니다.  안심, 즉 편안한 마음은 만드는 마음이다.  불란이 일어났을때, 불안정해 졌을때, 공포가  몰려 왔을때, 분노가 일어 났을때..  그 마음을 스스로 조작을 해서 편안한 마음을 돌이킬려고 하는 것이 안심(安心)이라 표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심(定心), 즉 삼매(三昧, Samadhi)는 어디엔가 몰입하는, 얽어매여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선방식구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 하셨나요?  문자 그대로 고정시켜져 있는것, 즉 정(定)자로 해석 하시는구나로 알아 들으셨어요? 

 ‘안심 불여 정심, 정심 불여 무심’이라 하셨습니다.  불여(不如)는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들은 바로는, 편안한 마음이 삼매에 든 마음만 못하고, 삼매에 든 마음이 무심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를 선(禪)적으로 말하자면, ‘안심 즉 정심, 정심 즉 무심 (安心卽定心, 定心卽無心)’ 입니다.  여기서 즉(卽)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즉(卽) 입니다.  안심 즉 무심이요, 무심 즉 안심이요.  (安心卽無心, 無心卽安心) 무심 즉 정심이요, 정심 즉 안심입니다. (無心卽定心, 定心卽安心)  확연하게 와 닿는 분 있으세요?  그렇지 못하다면 화두를 챙겨서 깨보세요.  이건 삼단계 중에서 상단계로 표현을 한 겁니다.  우리 선원장 스님은 하단계를 던지셨습니다.  여러분 어떤것을 체험을 해 보실래요?  지금 제가 말씀 드린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를 해야 알 수 있는 말이고, 육조선(六祖禪) 입니다. 

또다른 질문 중 하나였던 게.. 선불교(禪佛敎)하면 산속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국한해서 사회에선 스스로 격리해서 실질적 직접적으로 사회 참여의 행동이 결여된것으로 생각되어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상 선불교하면 매우 소극적으로 보인다는 얘기였습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선, 내가 안심과 정심과 무심을 뒤집어 보였듯이, 이것 역시 똑같은 견해로 어떻게 뒤집고 싶냐면 참선(參禪)이라는것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장 능동적이고,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용감한 행동이다. 

쉬운 방법과 어려운 방법들이 있습니다.  쉬운 방법과 어려운 방법 중 어느 것을 택하는게 적극적인 것입니까?  어려운 방법을 택하는 게 적극적인 자세인거죠.  우리는 어떤것들에 쉽게 노출되어 있습니까?  우리들이 쉽게 행하는것들에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회광반조가 쉽습니까?  아니면, 망념(妄念) 일어나는데로 사는게 쉽습니까?  보통은 망념 일어나는데로 사는게 쉽기 때문에 그리 하잖아요.  사회 현상을 정의(正義)라는 이름으로 진단을 해 봅시다.  혹은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현상을 진단을 해 봅시다.  부정적인 정부나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우리가 어떤 행동으로 뒤집어야 된다고 합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가서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그렇죠?  그 사회적인 현상을 조금 더 통찰, 더 깊은 눈으로 들여다 볼려고 하는 그 자세, 지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것 말고 더 크고 완전한걸 보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있고, 지금 나타는 이 현상에 마음을 바로 일으켜서 행동으로 할려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행동으로 보여줄려는게 정말 치유인지, 진짜 개혁을 하는건지는 모릅니다.  단지 설정된 정보로 이게 정의다, 이렇게 행동 해야 된다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어떤게 더 적극적인걸까요? 

실제로 포교 일선에 나가 계시는 스님들 중에서도 선수행 하시는 스님들을 소승으로 취급하거나 무위도식자로 취급합니다.  선수행 하시는 스님들이 불교를 위해서, 부처님 법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는 아주 소극적인 수행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것때문에 사회 참여 운동이 일어나고 불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미 해보시고 계시잖아요.  각자 벽을 앉아서 혹은 직장에서 나를 바로 명경(明鏡)같이 들여다보고 ‘이뭣고’ 하는게 쉽던가요?  어려워요.  가장 어려운 것을 할려고 한단 말입니다.  실제로 그걸 해 봐요.  그래서, 나는 그게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라고 하는 겁니다.  욕망을 쫒아가기는 쉽지만, 욕망을 통찰하면서 다스려 볼려고 행동하는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선(禪)은 그것이거든요.  내가 뭔가 일어나는것에 대해서 바로 행동하는게 아니고, 딱 그치고 진단을 해 보는 겁니다.  이게 뭔가 하면서요.  이것이, 내가 욕망을 쫓아 나간 것이, 행동을 한 이것이 결국은 정말 선(善)인가, 진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모두에게 좋은 그건가, 긍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절대적인 평안, 즉 부처로 도달하게 하는 방법인가 점검을 해 보자구요.  가장 적극적인것은 우리가 가장 온전해지고 완전해지는 거잖아요.  논리적인 사고를 해보고 뒤집어 보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십이연기(十二然起)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열두 단계를 말합니다.  관찰하는, 회광반조하는 참선자는 일상생활 하면서 촉(觸)으로 인해서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 바로 압니다.  관찰해보면 연관적으로 어디까지 제어가 되고, 어디는 제어가 안된다는 것도 압니다.  촉(觸)을 다스리는것 만으로도 수(受)와 애(愛)가 해결되버리기도 합니다.  수(受), 즉 받는 느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무명까지 해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라해서 그게 단계별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지혜가 높을수록 행(行, 상카라)을 바로 깨달아버리고 행을 모르고, 그냥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상카라’다고 거칠게 알고 있을 뿐이예요.  아주 미세하게 어디까지 ‘상카라’라고 하는지는 모릅니다. 

우주가 빅뱅을 통해서 작용을 하고 있잖아요.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죠.  작용하는 매개체가 시대별로 학자들이 다르게 진단을 합니다.  우리 머리에 지식이 많이 들어 있는 불자들의 함정이 뭔가 하면?  우리가 물질을 쪼개보니 끝에 진동이 있고, 진동 안에 비었더라, 즉 공(空)이더라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하죠.  그런 것은 못쓰는 겁니다.  본인이 직접 검증을 하지도 않은겁니다.  바닥을 관찰을 해 봅시다.  이 바닥이 바로 공(共)입니다. 우리가 이걸 인정합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선 허공과 이 바닥이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검정을 해봐야 되잖아요.  왜 하늘과 바닥이 같은건지..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바닥을 뚫어져라 관찰을 해봐야 합니다.  부처님은 불을 관찰하게 하시고, 물을 관찰하게 하시고, 바람을 관찰하게 하셨습니다.  바람을 실체가 안보이니 나뭇잎이 흔들리는것을 관찰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빗물 떨어지는 것을 관찰해 봤습니다.  여러분에게 운전할 때 진짜 차가 움직이는지 관찰해 보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내 몸만 관찰해봐도 왜 공(空)이라 하는지 몸으로 체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다시는 퇴보를 하지 않고, 다시 오염되지 않습니다.  그냥 이론과 지식만으로 가지고 검증하는 것은 금방 오염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론이 나오면 그 이론에 휘말리고 마는 겁니다.  몰입해서 물질만 바라보는것이 어떤이는 24시간, 일주일, 21일, 일년이 걸리기도 하겠죠. 

호흡을 관찰할 때 남방에선 희색을 관찰하게 합니다.  처음에 만들어서 그렇게 줍니다.  코끝에 있는 흰빛을 보라고 합니다.  그게 나중에 어떻게 되냐하면 조그만 빛으로 느껴지던게 점점 커지면서 온전히 흰빛밖에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경험을 해보니 그렇더군요.  완전히 삼매에 들어가보면 온전히 흰빛안에 자기가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몸도 안 보이고, 호흡도 안 보이고, 온전히 흰빛뿐이 됩니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그걸로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깨닫는것이 아니고 그저 그치는 것 일 뿐입니다.  그렇게 사선정을 갈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하잖아요.  대바라타는 사선정을 다 체험을 해봤지만, 바로 퇴보해서 지옥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럼 생명이 뭐란 말입니까?  뿌리를 완전히 해결해야 합니다.  뿌리를 완전히 해결하는 방법은 내 생각을 관찰해서 그 뿌리를 해결하는 겁니다.  그럼 그것은 다시 오염이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중생하고 똑같으나, 똑같이 오염되어 있는 것 같으나, 그 사람은 오염되는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49년을 선정에서 한번도 나오신 적이 없다고 조사스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십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선정에서 나오셨으면 미쳐 버렸을 겁니다.  선정에서 나왔다는건 중생계로 다시 발을 디딛으셨다는 얘기거든요.  부처님이 선정에서 나오시지 않으셨던게 바로 육조조사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일행삼매(一行三昧), 무심삼매(無心三昧)라고 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말하는 삼매, 즉 정(定)은 금강정(金鋼定), 능엄정, 금강명정이라고 합니다.  금강이라는건 다이아몬드니 깨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는 깨어지지 않는 정(定)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법을 만났어도 가치를 모릅니다.  내가 화두를 목숨줄보다 더 귀하게 여기라고 하잖아요.  여러분 목숨이 별건인줄 알아요?  여러분이 숨을 쉬다 안쉬면 그걸로 끝입니다.  어디가서 차사고를 크게 당해도 끝나는 겁니다.  그게 목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목숨에 목을 매잖아요.  얼마나 용맹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어야 이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스님들께선 대장부가 아니면 이 공부를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장부란 정의는 여성, 남성에 있는게 아니고 누가 발심(發心)을 했는지, 누가 이 큰공부법을 믿고 받아들여서 행동하냐 그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가르치면 벌써 분별(分別)부터 하잖아요.  내가 해보니 우주 삼천대천 세계를 다 바꿔도 우린 부처님의 은혜를 바꿀수가 없어요.  그래서 법화경을 보면서 눈물이 나는게, 그렇게 의심 많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않는 중생들을 포기를 안하셨던게 보여서였습니다.  부처님은 온갖 방편으로 중생으로 끌어올릴려고 하셨던 겁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알면 알수록 이 대자대비라는게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하는 수행중에, 특히 의정(疑情)을 만들어서 나를 폭발시킬려는 간화선 공부가 최고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공부라는 것, 그게 이 중생계에 가장 적극적인 자비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남는게 자비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 들어가보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게 뭐겠어요?  중생심이겠습니까?  그 자리에 올라가서 일절 이타심(利他心) 오로지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그 마음밖에 없어요.  그게 진짜 자비입니다.  내 이름을 내고 싶겠어요?  내 목숨을 부지하고 싶겠어요?  그 자리가.. 이미 그 자리가 뭔지 다 아는데..  이게 소극적인 수행이 아니고, 수동적인 수행이 아니고, 이 세상에 수행중에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수행이다라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선과 악의 정의라는게 생각을 조금만 해보면 이게 상대성이지 절대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우리가 선택한 수행법을 할 때 먼저 우리 그릇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개설해 놓으신 지켜야 할 것들은 지키도록 합시다.  겉넘치치 않게 차근차근 밟아서 그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겉넘치게 이것도 공(空)이고 저것도 공(空)이니 막행도 공이고 막식도 공이고 이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활달공발인과(豁達空撥因果)하야 망망탕탕초앙화(茫茫蕩蕩招殃禍)로다.  모든게 공(空)하다고 인과(因果)를 부정하면 끊없는 재앙을 부릅니다.  정반합하고 똑같아요.  처음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처음에 관찰해보니 바닥은 그저 고체입니다.  관찰을 해보니 고체가 아니더랍니다.  그건 물리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죠?  고체인것도 움직이고 있더란 말입니다.  고체도 수분이 있고, 온도가 있고 그러잖아요.  계속 관찰을 해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철스님께서 마지막에 뭐라 하셔습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어더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정반합이 되었습니다.  그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정답이라서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걸까요?  그래버리면 또 반쪽짜리 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확연한 자리에 들어갔어도 걸림없이 사는 사람들은 때로는 그걸 다 엎어 버려요.  역시 또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거예요.  하지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앞에서는 또 뒤집어 버려요.  부처님이하 모든 깨달으신 분들은 대치법을 사용하십니다.  공(空)에 집차하면 유(有)를 가치고 처 버리십니다.  유(有)에 집착하고 있으면 공(空)으로 처 버립니다.  선객은 이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게 정말 상대법을 가지고 다스리고 있구나 하고.  그래서, 약왕(藥王), 의왕(醫王) 이라고 하잖아요.  어리석을수록 그 반대가 진리인 줄로 압니다. 

시간 아껴가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수행 합시다.  타성에 젖을려고 하고, 자꾸 머리를 쓸려고 하는 이 습기를 없애야 합니다.  온통 의심 덩어리, 온통 호흡속에 쏙 들어가봐야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아는 것은 머리로 아는게 아니고, 계합(契合)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허공이 되고, 그대로 물이 되고, 그래도 빨간색이 되고, 이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때서야 동사섭(同事攝)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앞에 동사섭 하는 것은 폼잡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보살님이 동사섭을 할 수 있는거지, 범부가 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범부가 동사섭을 한다는건 흉내를 내는겁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면 진짜 좌선을 하는건가요?  그냥 폼 잡는겁니다.  좌(座)는 움직이지 않는것을 말하는거라 마음이 번뇌에 움직이지 않아야 좌(座)가 되는 겁니다.  선(禪)은 깨달아야 선인데 우리 그것 못하고 있잖아요.  그럼 우린 지금 폼을 잡고 있는 겁니다.  선객들은 그 개념 정리를 분명히 해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자기 혁명인지, 자기 개혁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 남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겁니다.  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남을 돕는다는 건 사기예요.  그렇지만, 카르마 단계를 내려서는 그것도 못하니까, 많은 근기들이 자기를 살피는것을 못하니 착한 일을 많이 하도록, 계를 지키도록, 남을 돕도록 가르치는 겁니다.  취모리(吹毛利)는 먼지도 자른다는 무사들이 사용하는 칼입니다.  적어도 선방에 오는 도반들은 본인이 선객(禪客)임을 알고, 내가 회광반조하면서 성성적적(盛盛寂寂)하게 나를 살펴보는 게 바로 취모리 칼이 되는 겁니다.  그 관(觀)으로 내 번뇌를 하나 놓치지 않고 속지 않고 차단 할 수 있습니다.  그 취모리 칼을 잡고 팔만사천 마구니 번뇌와 겨르는 선객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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