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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아정 (常樂我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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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oBama 작성일13-10-12 20:50 조회30,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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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2013년 10월9일 달라스 보현사에서 있었던 수요참선 시간에 지암스님께서 말씀 해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 입니다. 제가 옮기는 과정중에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과 본의 아니게 다르게 옮겨 졌을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혹시 내용을 읽어 보시고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암스님께 질의를 하셔서 잘못된 점은 정정받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경허스님 참선곡을 외우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때가 스물아홉이나 서른정도였던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끊임없이 퍼 일어나는 번뇌를, 끊임없이 퍼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집중력으로 감당을 못하니,  이렇게 부질없이 괴로워 하다가 이렇게 망상하는 것보다는 이거라도 외면서 나 자신을 경책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숲속에 들어가 뒷짐을 지고 이렇게 읖조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또 화두를 챙기고 그랬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때들 되돌이켜 보니 그때가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타성일편이 되고 한덩어리가 되어, 오직 이뭣고 하면서, 번뇌가 퍼 일어날 때 불에 나방이 붙듯이, 불에 티끌이 붙듯이 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지독하게 공부줄이 안 잡혔습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벌겋게 달은 화로에 한점의 눈이 떨어지는 것.  한점의 눈은 우리의 번뇌요, 벌겋게 달아 있는건 우리의 의단(疑端) 즉 우리의 의심덩어리 입니다.  그렇게 의심 덩어리가 만들어지면, 습기(習氣)로 파도는 칩니다.  물결은 일고 번뇌는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번뇌라는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로지 의정(疑情)에 푹 빠져 버려야 합니다.  그 한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던 그 때가 참 단순하게 살았고, 참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이 수행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미(五味)의 맛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자칫하면 권태로워 집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다른 감각적인 일들이 훨신 많습니다. 그래서, 그만 속아 버리고, 또 속아 버리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감각적인 욕망, 감각적인 기쁨, 내가 자동적으로 퍼 올리고 있는 번뇌가 마구니입니다.  내 본성을 알고 싶어하는 내 정진의 힘과 그 마구니와 싸운다 했을때, 거의 백전 구십구패  일겁니다.  좀 낫다 싶으면 백전 구십패가 되겠죠.  물론, 부처님과 같은 깨달은 분들은 백전백승을 하구요.  그게 홍로일점설이라.  퍼 일어나는게 소용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거저 만들어 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들이 거저 되서, 무위자연으로 연각(緣覺) 독각(獨覺)이 술술 되면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그게 안되니 이렇게 끊임없이 이 스님의 잔소리를 들어야 되고, 차를 운전해서 복잡한 도로를 달려와 함께 정진을 하기 위해 오는 것이겠죠.  한번 더 다 잡으십시요.  지금 여러분들이 추구하고 자꾸 속는 번뇌 덩어리, 감각적 욕망 덩어리 그런게 완전히 마구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전투 태세를 갖출것 아닙니까?  하지만, 마구니인지도 모르고 동무인 줄로 알고 딱 붙어 지내다보면 몇일, 몇주, 몇달이 그냥 날라가지 않습니까?  이래가지고야 언제 이 게임에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을 만들겠습니까?  그럼 이 타성일편을 만들어서 뭐가 좋은건가요?  그건 만들어 봐야 알 수가 있습니다. 

경허스님 참선곡을 보면, “부처님이 정녕히 이르사대, 마음깨쳐 성불(成佛)하여 생사윤회(生死輪回) 영단(永斷)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 저국토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할줄로 팔만장교 유전이라.”  했습니다.  생사(生死)란, 즉 번뇌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사(生死)라 했을때, 선객(禪客)들은 단순이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을 말하는거라 한다면 안되는 겁니다.  한 번뇌가 일어나면 그게 생(生)이요, 번뇌가 사라지는 게 사(死)인 것입니다.  일념(一念), 즉 한 생각에 번뇌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심성의 파동을 도인(道人)들이 관찰해 보니, 한 찰라에 엄청난 파장 즉 생멸(生滅)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장전에  지옥편을 할 때 일일일야 만사만생 (一日一夜 萬死萬生), 즉 하루에 무수히 많은 생사를 갖는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물론 철위산간(鐵圍山間)의 지옥고를 받는 생명체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만사만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순간에 만사만생을 하면 하루동안에는 얼마나 많이 태어나서 죽는것을 반복하겠습니까?  정신을 채려서 보면 그런것이 보입니다.  정신을 안 채리면 보지를 못합니다. 

어쨌든 참선하는 선객들은 정신줄을 놓친다, 알아차림을 놓친다 하면 업장소멸(業藏消滅)을 하세요.  업장소멸을 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홍로일점설.  내 의심덩어리를 뜨꺼운 불 덩어리로 만들어 내면 그대로 업장소멸은 되는겁니다.  무엇이라도 거기에는 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못한다 하고 공부는 해야겠다 하면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내 업보중에, 내가 욕구하는 중에 나로 하여금 이 무상법문을 알면서도 왜 이런가 하고 보면 답이 나옵니다.  내가 희미하고 아둔하다 하면 간경(看經)을 하세요.  금강경, 능엄경, 능가경 등을 하나 정해서 보면 좋습니다.  부처님 경전은 보면 볼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이 납니다.  물론, 선객은 그에 탐착을 해서는 안되지마는, 나를 공부 그릇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이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을 해 보세요.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는 백팔참회문을 보면, “제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얻거나 천상에 나며, 성문연각 보살 지위 구함 아니요.  오직 오직 최상승을 의지하여서 아뇩다라보리심을 냄이오이니, 원하건대 시방삼세 모든 중생이 다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라고 합니다.  참회하고 서원하고 절을 한 다음에 모든 중생이 다 같이 무상보리를 이루도록 회향을 합니다.  사실 우리 존재 그 자체가 회향(回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에고(ego)에 갖혀서 회향을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바로 회향인 것입니다.  사실은 끊임없이 돌고 순회하는 회향인데, 우리가 모를뿐입니다.  보살도(菩薩道)로 들어가서 회향한다는 것은 중생들에게 지혜의 빛, 깨달음의 빛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의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들도 다 보리심을 발해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무위도(無爲道)를 깨달아지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럼,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무엇일까요?  항상 상에, 즐거울 락에, 나 아에, 깨끗할 정입니다.  그럼 이와 반대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고정된 바가 없는 무상(無常), 괴로울 고(苦),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 더러울 오(汚)가 되겠죠.  교리상으로 들어가보면, 부처님께선 중생계를 말씀 하실때, 삼법인(三法印), 즉 일체가 무생하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나’라는 게 없다는 제법무아 (諸法無我), 모든게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 (一切皆苦)을 말씀 하셨습니다.  삼법인이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 중생계는 천상 이렇다 말씀 하신겁니다.  이 ‘나’라는 것을 집착하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갖혀 있는 중생계는 무상하다고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쾌락이나 기쁨도 고(苦)로 정의합니다.  왜 그럴까요?  쾌락이 고(苦)라는게 바로 와 닿는 분 계신가요?  여러분은 체험상 왜 쾌락이 고(苦)인지 알고 있습니다.  먹는건 즐겁습니다.  정말 즐겁습니까?  아니면 우리 뇌(腦)가 즐겁다고 착각하는 겁니까?  그런데, 덜 먹어도 괴롭고, 더 먹어도 괴롭고, 먹어서 탈이 나기도 합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오래 누워있으면 괴로워서 뒤척입니다.  그게 즐거움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 이 덩어리 자체가 고(苦)라.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꾸 미사어구로 감싸면서 관념적인 용어로 아름답다 한들.. 뭐가 인생이 아름답습니까?  문학이 그렇게 만들고, 다른 종교들이, 다른 삿된 가르침들이 그렇게 만들고 우리는 그것에 빠진것 뿐입니다.  그건 우리 인생을 장식할 뿐 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하게 장식하는 것 일 뿐입니다.  그 장식되 있는 모든 것을 다 떨쳐내고 나면 진짜 상락아정(常樂我淨), 그때서야 무상이 아니라 항상하며, 이 즐겁다는 것은 고(苦)의 반대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법희희열(法喜喜悅), 그야말로 변함없는 항상함으로 인해서 불안정하고 투명하지 않고 뭐가 뭔지 혼탁하지 않는 선명하고 고요함으로 인한 즐거움 입니다.  그냥 즐겁다 해서 우리의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무아(無我)이니 고정된 나는 없지만, 그 자리에 분명이 ‘아(我)’라고 표현을 해 놨단 말입니다.  그건 ‘참 나 (眞我)’, 그 자리가 참 나라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 중생계와 반대 입니다.  그게 어디 있냐 말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아(無我)의 반대가 어디 있습니까?  고통의 반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이뭣고?’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안하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것을 떼고, 이 최상의 공부법을 익혀 놓고도 다른데서 자꾸 즐거움을 찾을려하고, 돈에서 위안을 찾을려 하고, 배우자의 달콤한 말 한마디에 위안을 찾을려 하고, 인간관계에서 위안을 찾을려 하면 그게 되냐구요?  그런것들은 불안정한 세계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선객들은 기뻐도 참선을 해야되고, 슬퍼도 참선을 해야되고, 괴로와도 참선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괴로워 하고 있는 착각, 기뻐하고 있는 착각, 고뇌하고 있는 그 착각 다시 말해서 불안정한 파장을 얼른 돌이켜서 선명하고 고요한 상태로 들어갈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 이번 부처님 성도절에는 제대로 공부를 해 봅시다.  새벽까지 밤을 세워서 온전히 하루만이라도 나를 풍덩 빠뜨려 봅시다.  하루 한시간, 두시간 이렇게 공부해서는 또 그러다가 몇일 공부 못하고 넘어가고, 이러니 도대체 공부 맛을 못보고 있는 겁니다.  공부맛을 한번 탁 봐야지, 누가 하라 하던 말던 스님이 잔소리를 하나 마나 일을 하면서도 공부가 되야 되거든요.  공부하다 죽으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도(道)를 닦다가 죽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도를 닦지 않다가 죽으면 축생의 몸으로 갈 지 모르지만, 도를 닦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몸둥아리 걱정은 잊어 버리고, 참으로 참 나, 상락아정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무릎이 좀 아프고, 어깨가 좀 아파도 같이 모여서 애를 한번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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